선생님이 되놈 땅에서 살고 싶어한즉 어느 사람이 말했다. "더러운 걸 어떻게 하십니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참된 인간이 산다면이야 더러울 게 어디 있담!"
子欲居九夷 或曰 陋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 子罕 12
<논어>를 읽는다는 건 한 위대한 인격을 만나는 일이다. 이 대화만 보아도 공자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생각하는 스케일이 다르다. 예수도 당시 죄인이라 지칭된 사람들, 인간 취급도 못 받은 사람들과 거리낌없이 어울렸다. 기성 체제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했다. 소인과 군자의 구별이 이런 데서 생긴다. 소인은 경계 짓고 가르는 데 익숙하다.
<여씨춘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荊人有遺弓者而不肯索曰 荊人遺之荊人得之又何索焉 孔子聞之曰 去其荊而可矣 老聃聞之曰 去其人而可矣
형나라 사람이 활을 읽어버렸는데도 찾을 생각은 않고 말하기를, "형나라 사람이 읽은 것을 형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니, 어찌 찾을 필요가 있겠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형나라란 말을 떼어 버렸으면 좋았을 걸."(사람이 잃은 것을 사람이 줍는다.) 노자가 그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사람이란 말을 떼어 버리면 더욱 좋지."
내 나라 사람이 주울 것이니 찾을 필요가 없다는 형나라 사람도 훌륭하다. 적어도 우리보다는 한 수 위다. 그러나 공자는 가족이나 국가도 초월한다. 사람이 주울 텐데 무슨 상관이겠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노자는 한 발 더 나가 있다. 굳이 사람이니 아니니 구별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이 한 몸이 아니겠는가. 얻고 잃는 게 다르지 않다.
짧은 인생에서 배워야 할 게 많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소인과 어울리면 평생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책에서라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