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식 2

얼떨결에 / 고증식

나이 팔십에 여주 당숙은 다신 수술 안 받겠다 선언하고 두 해쯤 더 논에서 살다 돌아갔다 누구는 애통해하고 누구는 대단한 결단이네 평하지만 사실은 무서워서 그랬단다 얼떨결에 한번은 했지만 수술받고 깨어날 때 너무 아프더란다 이건 조카한테만 하는 얘기지만 치과도 안 가본 놈이 선뜻 따라가고 남자들 군대도 멋모를 때 한번 가는 거 아니냐고 얼떨결에 세월만 갔지 나이 먹었다고 다 깊어지는 게 아니더라고 죽을 때는 아마 그럴 거라고 얼떨결에 꼴까닥하고 말 거라고 그렇게 얼떨결에 노래하던 당숙은 내년에 뿌릴 씨앗들 골라 놓고 앞뒤 마당도 싹싹 비질해 놓고 그 길로 빈방에 들어 깊은 잠 되었다 - 얼떨결에 / 고증식 올 한 해도 꼬리에 다다랐다. 돌아보니 일 년이 얼떨결에 후딱 지나간 것 같다. 사람의 생애도 마찬..

시읽는기쁨 2019.12.23

실언 / 고증식

고향에서 이발로 먹고 사는 깎새 형이 들려준 우스개 한 토막 바야흐로 설 단대목에 오줌 누고 뭐 볼 새도 없이 바쁜데 엊그제 새로 들인 머리나 감기는 시다 녀석 하나가 세상 둘도 없는 뺀질이더라고 그 녀석 그날따라 별나게 더 뺀질거려 보다 못한 깎새 형 버럭 한소리 질렀다는데 - 야 이놈 자식아, 그만 좀 뺀질거리고 얼릉 여 와 손님 대가리나 감겨! 순간, 길게 목 빼고 엎드렸던 그 손님 문제의 대가리 번쩍 치켜들고 한참이나 뻥하게 쳐다보더라고 - 실언 / 고증식 당황했을 깎새 형과 손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다 녀석은 얼마나 킬킬거렸을 것인가. 악의가 아닌 줄 알기에 실소 뒤에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을 것 같다. 아마 유머 있는 손님이라면 "야, 대가리 좀 잘 감겨봐." 정도의 대꾸는 있지 않..

시읽는기쁨 2015.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