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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묘유(眞空妙有)

30대 후반에 붓글씨를 배운 적이 있다. 동네 서예학원에 다니다가 좀 더 이름 있는 선생한테 배운다고 모 신문사 문화센터에 들어갔다. 가르치던 선생은 국전 특선 등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는 분이었다. 이 분은 서예 외에도 역사적 사건에 얽힌 배경을 설명하고 수강생의 관상을 봐주는 등 강의를 재미있게 진행했다. 날 보고는 젊을 때는 그늘에 가려져 있지만 50이 넘으면 빛을 본다고 잔뜩 희망 섞인 덕담을 했다. 결과적으로 빛 본 것 하나 없지만 들을 때는 기분 좋은 말이었다. 하여튼 이 분은 언행을 통해 자신이 뭔가 있어 보이게 만드는 특출한 재주가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강의였다. 몇 달 다니지 않아서였다. 서예 전시회를 한다고 하나씩 작품을 만들라고 했다. 초보인데 벌써 무슨 작품이냐고 손..

길위의단상 2021.04.14

맘과 허공 / 류영모

마음이 속에 있다고 좇아 들어 못 봤거늘 허공이 밖에 있대서 찾아 나가 만날 손가 제 안팎 모르는 임자 아릿다운 주인인가 온갖 일에 별별 짓을 다 봐주는 맘이요 모든 것의 가진 꼴을 받아주는 허공인데 아마도 이 두 가지가 하나인 법 싶구먼 제 맘이건 쉽게 알고 못되게 안 쓸 것이 없이 보고 빈탕이라 망발을랑 마를 것이 님께서 나드시는 길 가까움직 하구먼 - 맘과 허공 / 류영모 다석 류영모 선생은 56세 때인 1946년부터 30년 가까이 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3천 수 가까운 한시와 시조가 들어있다. 이 시조도 그중 한 편이다. 선생은 공(空)을 만물의 근본이며 존재의 바탕으로 보았다. 이 우주의 참된 실재는 물질이 아니라 공, 즉 빔이다. 마음이 공과 하나되어 공색일여(空色一如)의 자유에 이르는 게 깨..

시읽는기쁨 2013.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