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 4

됐심더 / 곽효환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았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애련한 시를 쓰는 한 시인이 선배 시인의 소개로 고고했으나 불의의 총탄에 세상을 뜬 영부인의 전기를 썼다 불행하게 아내를 잃은 불행한 군인이었던 대통령이 두 시인을 안가로 초대했는데 술을 잘 못하는 풍채 좋은 선배 시인은 그저 눈만 껌벅였고 왜소했으나 강단 있는 두 사내가 투박한 사투리를 주고받으며 양주 두 병을 다 비웠다 어느 정도 술이 오르자 시인의 살림살이를 미리 귀띔해 들은 대통령이 불쑥 물었다 "임자, 뭐 도울 일 없나?"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인이 답했다 "됐심더" 강과 바다가 만나 붉게 타오르는 강어귀 언덕에서 가난 섞인 울음을 삼키던 여학교 사환이었던 소년은 꿈꾸던 시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일생을 적막하게 살았고 만년을 쓸쓸히 병마에 시달리다 눈을..

시읽는기쁨 2019.02.01

12월 / 박재삼

욕심을 털어버리고 사는 친구가 내 주위엔 그래도 1할은 된다고 생각할 때 옷 벗고 눈에 젖은 나무여 네 뜻을 알겠다 포근한 12월을 친구여! 어디서나 당하는 그 추위보다 더한 손해를 너는 저 설목(雪木)처럼 견디고 그리고 이불을 덮는 심사로 네 자리를 덥히며 살거라 - 12월 / 박재삼 올 한 해도 그런대로 잘 살았구나. 친구여, 너를 대견하다고 토닥거려주고 싶구나. 전에는 널 참 많이 나무랐지. 잘못한 것만 꼬집어서 심하게 힐난했지. 그러나 이젠 나도 너그러워졌는가 보다. 그래, 그만하면 됐다. 네 마음 잘 다스리면서 살아왔다. 모자라고 부끄러웠던 일 왜 없었겠니. 그래, 그만 하니 됐다. 12월의 이 자리가 참 포근하구나.

시읽는기쁨 2013.12.19

무언으로 오는 봄 / 박재삼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 무언(無言)으로 오는 봄 / 박재삼 시끄럽고 어수선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봄은 왔다. 말없이 묵묵히 가까이 왔다. 집 뒤 응달의 개나리도 봄물이 들기 시작했다. 가지에 찍힌 노란 점들이 애틋하고 눈물겹다. 널 보면 왜 자꾸 한숨이 나오는지..... 심신이 지쳐가던 이때에 다행히 며칠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내일부터는 봄을 만나러 가까운 산에라도 들어가봐야겠다. 온갖 소음으로 들끓는 내 마음도 조금은..

시읽는기쁨 2010.04.06

천년의 바람 / 박재삼

천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 보아라 보아라 아직도 천 년전의 되풀이다. 그러므로 지치지 말 일이다. 사람아 사람아 이상한 것에까지 눈을 돌리고 탐을 내는 사람아. 나무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식물의 특징으로 단순함을 들면서 그 단순함이 자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세상이 복잡해질 수록 우리는 단순함에서 구원의 빛을 본다. 천년 전의 바람은 지금도 똑 같이 불지만 지리하지 않고 늘 새롭다. 무위(無爲)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아무 것도 이루려는 마음이 없지만 모든 것을 다 이룬다. 길을 가다가 바람을 만나면, 그저 말없이 생각없이 맞기만 할 일이다. 쓸데..

시읽는기쁨 2004.0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