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4

사람을 쬐다 / 유홍준

사람이란 그렇다 사람은 사람을 쬐어야지만 산다 독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 사람이 사람을 쬘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오랫동안 사람을 쬐지 않으면 그 사람의 손등에 검버섯이 핀다 얼굴에 저승꽃이 핀다 인기척 없는 독거 노인의 집 군데군데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피었다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새에 핀 이끼를 노인은 지팡이 끝으로 아무렇게나 긁어보다가 만다 냄새가 난다, 삭아 허름한 대문간에 다 늙은 할머니 한 사람 지팡이 내려놓고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바라보고 있다 깊고 먼 눈빛으로 사람을 쬐고 있다 - 사람을 쬐다 / 유홍준 밤골에서 살 때 비어 있던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가 들어왔다.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이 찾지도 않았다. 어떤 사연으로 산골로 들어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네..

시읽는기쁨 2021.12.05

오므린 것들 / 유홍준

배추밭에는 배추가 배춧잎을 오므리고 있다 산비알에는 나뭇잎이 나뭇잎을 오므리고 있다 웅덩이에는 오리가 오리를 오므리고 있다 오므린 것들은 안타깝고 애처로워 나는 나를 오므린다 나는 나를 오므린다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가슴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내가 내 입을 오므릴 수 있다는 것이 좋다 담벼락 밑에는 노인들이 오므라져 있다 담벼락 밑에는 신발들이 오므라져 있다 오므린 것들은 죄를 짓지 않는다 숟가락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뜨고 밥그릇은 제 몸을 오므려 밥을 받는다 오래 전 손가락이 오므라져 나는 죄 짓지 않은 적 있다 - 오므린 것들 / 유홍준 이 시를 읽으며 맨 처음 연상된 것이 고향 마을이었다. 집들이 산자락에 앉은 모양새가 바로 오므린 것이었구나. 오므린 것은 단순한 형상만 ..

시읽는기쁨 2014.11.18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 유홍준

내 친구 재운이 마누라 정문순 씨가 낀 여성문화 동인 살루쥬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앉아서 오줌 누는 남자 동국대학교 사회학과 강정구 교수에 대한 기사가 있었다 어이쿠, 했다 나도 앉아서 오줌 눈지 벌써 몇 년, 제발 변기 밖으로 소변 좀 떨구지 말아요 아내의 지청구에, 제기럴 앉아서 오줌 싸는 거 습관이 된 지 벌써 수삼 년, 날마다 변기에 걸터앉아서 나는 진화론을 곱씹는다 이게 퇴화인가 진화인가 퇴행인가 진행인가 언젠가 여자들이 더 많은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박서영은 배를 잡고 웃고 강현덕은 그것이야말로 진화라고 웃지도 않고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역시 여자는 새침데기들이 더 무섭다 그건 그렇고 강정구 교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어서 수다 좀 떨까 난 앉아서 오줌 싸니까 방귀가 잘 뀌어지던데, 낄..

시읽는기쁨 2011.05.18

가족 / 진은영

밖에서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가족 / 진은영 독신으로 사는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혼자라면 가족으로부터 아무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사람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결혼한 사람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도 가족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은 의무와 책임을 동반한다. 죽을 때까지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가정이 따스한 보금자리만은 아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말 못하고 견뎌야 하는 아픔이 있다.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상처는 더 쓰리고 아프다. 유아기 때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평생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많다. 부모자식 사이에 또는 형제 사이에 갈등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 가..

시읽는기쁨 2010.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