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썩어 부드러운 흙에 골을 내어 눈이 빨간 무씨를 넣고 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흙을 덮는다 까치가 쏘물다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가 가고 나면 내려와 솎아먹을 것이다 씨를 묻고 내려온 뒷날 밤 마침맞게 천둥번개 치고 봄비 내린다 이건 썩 잘 된 일이다 봄비가 씨앗 든 밭을 측은측은 적시는 일만큼 크고 넉넉한 자비를 본 적이 없다 모종을 얻은 밭의 기쁨이나 밭을 얻은 모종의 기뿜이 막상막하다 심어놓고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서야 한다 - 자비 / 이경 이 시를 읽으면 농사는 성스러운 제의(祭儀)와 같다. 지금은 헛간에나 쳐박혀 있을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새삼 눈물겹게 다가온다. 근원적 의미에서 이런 농사를 짓는 농부는 이젠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들다. 올해는 흙을 밟을 일도 없게 생겼다. 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