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2

산길에서 / 이성부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발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 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 되는지를 나는 안다 - 산길에서 / 이성부 산을 사랑하는 시인이다. 이성..

시읽는기쁨 2014.08.25

깨우치다 / 이성부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 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

시읽는기쁨 2007.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