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2

겨울 냉이 / 고명수

폭풍한설에도 혼신의 힘을 다해 냉이는 자란다 낙엽과 지푸라기 아래 숨어 봄을 기다리는 냉이, 행여 들킬세라 등 돌리고 있는 냉이를 더듬더듬 찾아내어 검불을 뜯어낸다 봄 내음이 나는 냉이국을 먹으며 낙엽과 지푸라기 속에서도 목숨을 지켜 마침내 싹을 틔워낸 냉이를 생각한다 가파른 삶의 벼랑 위를 조심조심 걸으며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봄을 기다리는 냉이를 보라 서슬 푸른 정신으로 살아야 하리라 서슬 푸른 눈으로 살아야 하리라 겨울 냉이가 자신을 이기듯이 몰래 숨어 자란 냉이가 온몸을 우려내어 시원한 된장 국물이 되듯이 우리도 누구엔가 시원한 국물이 되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서원 돌담길에도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길에도 숨어있을 냉이, 환한 한 마디의 말씀이 오랜 궁리와 연찬에서 솟아나듯이 청빙(淸氷)을 뚫..

시읽는기쁨 2013.01.17

밥값 / 정호승

어머니 아무래도 제가 지옥에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아침에 출근하듯이 갔다가 저녁에 퇴근하듯이 다녀오겠습니다 식사 거르지 마시고 꼭꼭 씹어서 잡수시고 외출하실 때는 가스불 꼭 잠그시고 너무 염려하지는 마세요 지옥도 사람 사는 곳이겠지요 지금이라도 밥값을 하러 지옥에 가면 비로소 제가 인간이 될 수 있을 겁니다 - 밥값 / 정호승 서점에 간 길에 정호승 시인의 신작시집 을 샀다. 지난 천안함 사건 때 시인에 실망하여 시를 읽지 않으려 했지만 그게 꼭 그럴 일만 아니다 싶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으면 편식이 된다. 내 생각이 존중받으려면 나와 다른 생각도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는 시 자체로 즐기면 되는 것이지 시인의 사상이나 행위와 꼭 결부시킬 필요는 ..

시읽는기쁨 2010.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