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속일상

행복한 평일 산행

샌. 2011. 12. 20. 07:32


평일에 홀로 여유롭게 산행을 하면서 퇴직의 행복감에 젖는다. 갇힌 방에서 탈출을 꿈꾸며 먼 산을 그리워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자유의 몸이 된 게 아직 믿기지 않는다. 늦게 일어나도 눈치 볼 일 없고, 가고 싶은 데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도시의 러시아워도 나와는 무관하고,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지 않아도 된다. 주말이면 북적이는 산이지만 나와는 무관한 일, 평일의 조용한 길을 호젓하게 걸을 수 있다. 직장에서 애쓰는 동료들을 떠올리면 더욱 즐거운 일이 아닌가. 마치 정체로 꽉 막혀 있는 상행선 옆으로 뻥 뚫린 하행선을 달리는 기분이다.

 

어제는 검단산에 올랐다. 영하의 기온이었지만 바람 없고 맑았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에서 유길준 묘를 지나는 왼쪽 능선길로 정상에 오른 뒤 현충탑을 지나는 길로 내려왔다.

 

검단산(黔丹山, 657m)은 하남시 동쪽에 있는데, 하남시 일대가 백제 발상지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이곳 검단산이 하남 위례성의 진산이라고 추정한다. '검'은 '신성하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 '단'은 제단을 의미하기 때문에 검단산은 '신성한 제단이 있는 큰 산'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 백제 한성시대에 왕이 이곳에 올라 하늘에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이 내시별감을 보내어 검단산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백제 건국신화에 나오는 동쪽 높은 산이 검단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유적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초입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유길준(兪吉濬, 1856-1914) 선생 묘가 나온다. 선생은 일본과의 합병에 끝까지 반대했는데, 임종 때에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후손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지 유언과 달리 산소에는 비석을 세워 놓았다. 선생은 두 부인을 좌우로 데리고 누워 있다.

 

이곳에서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들었다.

 


평일 산길은 조용하다. 그러나 검단산은 휴일이면 등산객으로 만원이다.복잡하니 사람들은 샛길을 찾아 다니고,산길은 패이고 넓어진다. 산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이 들면 산은 이내 망가진다. 그래서 주 등산로 외에 샛길로 다니지 말라는 안내문이 많이 붙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산에 자주 다니는 것도 미안하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이다. 아래로 팔당댐이 보이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도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 지역도 아닌데 지면과 가까운 하늘에는 뿌연 연무 띠가 드리워져 있다.

 

팔당 쪽 한강을 옛날에는 두미강(斗尾江)이라고 불렀다. 팔당댐이 있는 곳은 두미협(斗尾浹)이었고, 배가 정박하는 두포(斗浦)가 있었다. 얼마 전에 읽은 <매혹>이라는 소설에는 이벽이 살았던 한강가 마을 이름이 두미 마을로 나온다. 그렇다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도미부인 전설의 무대도 이곳일지 모른다.

 

오랜만에 호젓한 산길을 잘 걸었다. 내가 걸은 길이 이천 년 전 백제인들이 걸었던 길이었기도 하다. 그들도 산 정상에 올라 저 아래 산하를 내려다보며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간 산이고 길이다. 그러나 누가 알까, 그 낱낱의 염원과 사연들을.

 


* 산행 시간; 11:30 - 15:00

* 산행 경로; 애니메이션 고교 - 유길준 묘 - 전망바위 - 정상 - 호국사 - 현충탑 - 애니메이션 고교

 

'사진속일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과 사형제  (0) 2011.12.30
눈 내린 산길을 걷다  (1) 2011.12.24
아내는 1학년  (0) 2011.12.18
한강 가톨릭회에서 천진암에 가다  (2) 2011.12.13
프라디아  (0) 2011.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