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가톨릭회에서 천진암에 갔다. 그동안 등산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천진암을 찾았지만 성지 순례로 함께 하기는 오랜만이었다.
천진암(天眞菴)은 일반적인 순교 성지와는 달리 한국 천주교가 태동한 의미 있는 장소다. 1700년대 후반에 광암 이벽(李檗)을 비롯한 학도들이 이곳에 모여 학문을 연마했다. 그중에는 서학(西學)이 포함되어 있었고, 중국에 들어왔던 천주교 교리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생적인 신앙 단체로 발전했고 한국 천주교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10대였던 정약용(丁若鏞) 선생도 이곳에서 공부했고, 이때 천주교를 처음 접했다. 함께 했던 사람들이 권철신,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등이다.
이들은 천진암 공동체에서 실학 연구와 강의 외에 천주학 연구, 공동 신앙생활 실천, 주일 제정, 천주공경가와 십계명가저술을 통해 한국 천주교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했다. 그리고 이승훈을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해서 최초로 세례를 받게 했다. 교회는 뒤에 수표동을 거쳐 명례방으로 옮겨졌다.
다산의 네 형제 중에 순교한 정약종의 묘가 천진암에 있다. 큰형인 정약현은 고향을 지켰지만,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귀양을 갔다.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천주(天主)를 믿는다는 빌미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정약현의 사위였던 황사영도 백서 사건으로 죽음을 맞았다.
천진암 묘역에는 신앙의 선조인 다섯 분의 순교자가 잠들어 계신다.
이벽(李檗, 1754-1785), 을사박해때 단식순교
이승훈(李承薰, 1756-1801),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
권일신(權日身, 1742-1791), 신해박해 때 귀양 도중 순교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신유박해 때 순교
정약종(丁若鐘, 1760-1801),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
옛 천진암 터로 가면서 만약 이들 천진암 그룹이 정치의 주류가 되었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상상해 본다. 서구 문물이나 신학문의 도입이 1800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 훨씬 더 빨리 정치 개혁과 사회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동아시아나 세계의 역사도 다르게 돌아갔을지 모른다. 아니면 이들 역시 보수적인 유학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을수도 있다. 기존의 틀을 깨는 게 만만하게되는 일이 아님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천진암은 불교의 암자였는데 당시에 폐사된 상태였는지, 아니면 스님이 계셨는지는 가톨릭계와 불교계의 입장이 다른 것 같다. 만약 후자가 사실이라면 스님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며 서학 연구를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불교와 가톨릭의 우호적 관계는 이런 초기의 인연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전해오는 얘기에는 가톨릭 박해 때 이곳 스님들도 천주교도를 숨겨준 죄목으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연들은 두 종교의 갈등보다는 화합과 상호존중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