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보살예수(3)

샌. 2007. 11. 3. 12:16

<부록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선과 그리스도교의 통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종교는 시대와 환경에 따라 끊임없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유기체와 같다. 우리는 흔히 종교를 명확한 교리나 사상체계, 그리고 뚜렷한 울타리를 지닌 공동체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사실상 종교는 그러한 고정된 정체성을 지닌 물체라기보다는 변하는 역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발전해가는 역동적 실재이다.


그런 역사적 변천 과정 속에서 현대에 당면하고 있는 새로운 사건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본격적인 만남이다. 서구 사상가들이나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불교를 단지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니라 깊은 공감적 이해를 바탕으로 진지한 종교적 대화의 상대로 관심을 갖는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그에 비하여 두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실제 불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사상적 만남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두 종교 사이의 교리적, 사상적 간격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첫째, 신관과 세계관의 차이다. 그리스도교는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의 제1원인이 되는 절대적 실재로서의 신을 믿는 종교이지만, 불교는 그러한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신론적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론적 차이를 인정하는 이원적 세계관인데 비해, 불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생성되고 상호 의존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여기에 만물의 제1원인 같은 것은 없다.


둘째, 이런 차이는 인간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건너기 어려운 질적 차이를 강조하지만, 불교에서 절대적 실재는 언제나 사물 가운데 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절대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동양 종교에서는 자연히 인간과 절대적 실재의 완전한 일치를 궁극적 진리로 강조한다. 절대적 실재는 인간 심성 안에 이미 완전하게 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다만 그것을 깊이 자각하고 실현하면 된다. 이렇게 자기발견과 자기실현을 통해서 인간은 절대와 한 치도 어긋남 없는 완벽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동양 종교는 근본적으로 신비적 합일의 종교다.


셋째, 그리스도교는 절대자 하느님의 인격성을 강조하지만, 불교에서는 절대적 실재의 탈인격성을 강조한다.


넷째,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인간, 절대와 상대 사이에 존재론적 불연속성뿐 아니라 극복하기 어려운 도덕적 괴리를 강조하고 하느님의 초자연적 은총의 도움을 중시한다. 그러나 동양 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누구든 부처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인간에 대한 낙관적 믿음이 깔려 있다.


다섯째, 그리스도교가 절대와 상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을 인간의 의지와 죄악성에서 본다면, 불교는 부처와 중생의 차이를 깨달음과 무지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가 되었고, 불교는 지혜와 수행을 강조하는 명상적, 철학적 종교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여섯째, 그리스도교는 하느님의 역사적 계시를 중요시하지만, 불교는 사물의 이법을 중시한다. 하느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한 특정한 민족의 역사에 개입하여 인간을 향한 자신의 뜻을 계시했으며,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한 분이다.


일곱째, 그리스도교는 인생을 반복할 수 없는 유일회적 현상으로 보지만, 불교는 윤회전생을 믿는다. 인간의 독특한 존재론적 위상을 강조하는 그리스도교와는 달리 불교는 동물까지 포함하여 일체 중생이 하나의 통합된 윤회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가르친다. 그리스도교는 역사의 완성과 종말을 믿지만, 불교는 그런 것을 부인한다.


이런 차이점만 본다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도저히 통약 불가능한 이질적 패러다임에 근거한 종교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이원적 대립을 넘어서는 유일신 종교의 다른 모습을 보게 되며 동양 종교 전통과의 친화성과 접촉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3세기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다.


동양적 그리스도교 : 신관과 인간관


에크하르트의 그리스도교는 ‘동양적 그리스도교’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신관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이원적 질서를 지양한다. 그리고 신비적 합일을 이루기 위한 그의 수행론이 불교와 매우 흡사하다.


에크하르트의 하느님은 그 안에 무한한 생명력이 끓어오르는 역동적 실재로서, 이 세계는 그 생명력이 자연스럽게 분출한 산물이다. 하느님과 피조물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생명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 창조는 어느 한 시점에서 하느님이 자의적 의지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행위라기보다 하느님의 넘쳐흐르는 생명력의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분출에 의한 것이다. 에크하르트의 신관은 하느님 안에 있는 세계, 세계 안에 있는 하느님을 말하는 일종의 범재신론(凡在神論)에 가깝다. 하느님과 세계는 불가분적이다. 모든 유한한 존재는 존재 그 자체인 하느님을 떠나 그 밖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그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찬란한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존재이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도 하느님의 초월적 지성을 닮아 순수하고 무한하다. ‘영혼의 불꽃’이라고도 불리는 이 지성은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영혼의 뿌리 혹은 근저(Grund)이다. 영혼의 근저는 신의 근저로서 둘은 완전히 하나이며, 거기서 완벽한 신인합일이 이루어지며, 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에크하르트 신비주의의 극치이다. 에크하르트는 이것을 ‘돌파’(Durchburch)라고 부른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바로 이러한 일치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인간에서도 실현되어야 할 진리다. 하느님이 인간이 된 이유는 그리스도와 똑같이 하느님으로 태어나기 위함이라고 에크하르트는 말한다. 에크하르트는 신과 피조물의 이원적 질서가 극복되고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가 완전히 사라지는 궁극적 경지를 말함으로써 동양적 일원론, 동양적 자연주의, 동양적 심성론에 근접하고 있다.


지성과 불성


초탈과 무념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우리가 영혼의 벌거벗은 본질이자 근저인 지성, 텅 빈 무로서의 지성에 이르려면, 당연히 그것을 덮고 있는 온갖 종류의 정신적 상(像)과 욕망을 제거해야만 한다. 심지어 하느님에 대한 상마저 떠나 전적으로 ‘비고 자유로워야’ 한다. 이 ‘떠나는’ 행위가 곧 에크하르트가 그토록 강조하는 초탈(超脫)이고 초연(超然)이다.


도가의 무위(無爲), 선의 무념(無念), 에크하르트의 초탈(超脫)은 사물이든 생각이든 지식이든 행동이든 모든 욕심과 집착을 떠나는 것을 의미한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생각이나 행위 자체가 아니라 자기사랑, 자기의지, 자기계박, 그리고 소유욕이다. 단적으로 아집(我執)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방하(自己放下)야말로 초탈의 핵심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복음서의 말씀에 대한 유명한 설교에서 에크하르트는 마음의 가난을 설명하기를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아무 것도 알지 않으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단 세속적인 의지나 앎이나 소유뿐만 아니라 종교적, 영적 의지나 앎이나 소유까지 버리는 철저한 초탈을 말하고 있다.


에크하르트에서나 선에서나 철저한 부정은 동시에 순수한 긍정을 의미한다. 초탈의 부정을 매개로 하여 사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적 욕망에 의해 왜곡된 시각을 버리고 순수한 지성 혹은 진심에 근거하여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근저에 뿌리 박고 본질적 삶을 사는 자는 이기적 욕망을 떠나 하느님의 빛 아래서 사물들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접하며 산다. 아무런 두려움이나 근심 없이 하느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자유롭게 산다. 에크하르트는 그러한 인간을 ‘참사람’이라 부른다.


참사람과 무위진인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자신의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조금도 다름없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당당히 살아간다. 그에게는 아쉽거나 부족한 것이 없다. 에크하르트는 그런 사람은 이제 기도조차 필요 없다고 말한다. 참사람은 자기 자신 외에 누구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는 하느님을 위해 살지도 않는다. 그는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산다. 철저한 초탈과 무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 자신의 존재 자체에 뿌리를 둔 본질적 삶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다. 종교, 교리, 사상, 제도, 개념, 주의, 그 밖의 어떤 관념의 탈도 쓰지 않는 벌거벗은 무의도인(無衣道人), 자기 자신 외에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무의도인(無依道人), 자신의 벌거벗은 존재 외에 다른 아무 것도 내세울 필요가 없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이야말로,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참사람이다.


선의 극치를 이룬 임제선에서는, 보리니 열반이니 불성이니 앎이니 하는 교리나 관념을 거부하고 부처와 중생, 피안과 차안의 구별을 떠나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적 행위 가운데서 진정한 인간다움을 실현할 것을 촉구한다. 불교의 체취가 말끔히 사라져 더 이상 불교랄 것도 없는 ‘세속’의 종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에크하르트가 추구하는 영성 역시 활동적 삶의 영성이다. 종교와 세속의 대립을 넘어서는 ‘비종교적 종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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