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보살예수(1)

샌. 2007. 10. 23. 10:47

길희성 님이 쓴 '보살예수'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3년 전에 있었던일요신학강좌에서 저자가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제목으로 한 강의 내용을 모은 것이다. 제목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부감이 들 정도로 도발적이겠지만, 책의 내용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만남을 주제로 하여 두 종교를 비교하며 공통되는 점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나로서는 불교에 대해 다시 공부하게 되고, 좀더 넓은 시각으로 그리스도교를 바라보는 데에도도움이 되고 있다.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교리와 사상보다는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구원하는 힘이라는 것을 다시 깨닫는다.

아래에 책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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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강. 그리스도교와 이웃 종교들


1-1. 하느님은 ‘종교다원주의자’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사랑이다.


나는 종교다원주의자다. 하느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과 관계 맺는 존재이며,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한다. 하느님은 수많은 성자와 다양한 종교적 미디어를 통해 인간과 교류해왔고, 인간도 그들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나아가 성인, 성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계시자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그 안에 신성을 갖고 있다. 여기에 그리스도교 사상과 동양 종교 사상이 만날 수 있는 근거가 있다.


1-2. 제국주의와 그리스도교 선교


다양한 문화, 다양한 삶의 방식, 다양한 종교는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곳은 아프리카와 한국과 필리핀이다. 아프리카는 아프리카만의 독특한 영성으로 토착화한 ‘아프리카적 그리스도교’로 변했다. 그러나 한국은 유일하게 불교, 유교 등 심오한 종교 전통이 있었음에도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한 유일한 나라다.


1-3. 왜 한국에서 그리스도교 선교가 성공했는가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는 하느님이 유독 한국을 사랑해서 이 땅에 그리스도교를 번성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첫째,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어느 서구 그리스도교 국가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면 해방과 동시에 그리스도교는 청산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 통치하에서 그리스도교는 애국심이나 민족주의와 함께 갈 수 있었다.

둘째,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시기에 한국 사회는 종교적 진공 상태였다. 조선 시대 불교는 명맥만 유지되고 있었고, 유교는 종교성이 약해 민중의 욕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셋째, 6.25와 그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같은 사회 변동의 영향이다.


1-4. 그리스도교의 패러다임 전환


다원주의적 종교관을 가지면서도 어느 특정한 종교를 신앙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스도교 역사에는 세 번의 큰 패러다임 전환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리스철학 사상을 수용한 일이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그리스철학 사상과의 만남을 통해 신학이라는 보편적 언어를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존재하다가 사라졌을 것이다.

두 번째는, 갈릴레이 이후 근대과학과의 만남이다. 그러나 아직도 성서적 세계관과 과학적 세계관과의 만남과 충돌은 그리스도교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세 번째는, ‘동양 종교’와의 만남이다.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진리관과 배타적 구원관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다. 신학에 또 한 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에게 도전이며 기회다.


1-5. 한국 종교문화의 다원성과 그리스도교의 배타성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종교다원 국가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만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강하다. 오직 그리스도교 신앙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 조상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는가? 구원의 종교가 멸망을 외치는 종교, 화를 전하는 종교가 되어 있다.


1-6. 새로운 선교관과 구원관


현대의 선교관은 예수님 자신의 선교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를 전파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신 분이다. 하느님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사람들 삶 속에 계시고,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알게 하신 분이다. 이런 선교관은 이웃 종교와도 충분히 함께 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됨’이다. 개인이 이기적, 자기중심적인 삶을 떠나 하느님과 하나 되고,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어, 소외, 단절, 외로움을 극복하고 더 큰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됨에는 감사와 기쁨이 있다. 그리고 이 하나됨의 인격적 표현이 사랑이다. 구원이라는 영어 단어 ‘salvation’은 라틴어 ‘salus’에서 왔는데, 살루스는 ‘건강’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이나 인간과의 잘못된 관계에서 잃은 건강을 되찾는 것이다. 구원은 자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과 통교하며 이웃, 자연과 하나되는 인간다운 삶이며, 거기에 영생이 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온갖 차별과 편견, 집단 이기주의를 허무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허물다 집단적 배타성과 편견에 희생되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정결과 불결, 이웃과 원수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됨을 선포하여 실천하신 분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복음이다.


그리스도교 역사는 심하게 말하면, 이러한 예수님을 배반해온 과정이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도그마를 만들고, 그리스도교라는 울타리를 쳐서 하느님의 구원을 전매특허라도 낸 듯 독점했다. 그리스도교의 참다운 존재 이유는 자기 울타리를 치고 영역을 확장하는 데 있지 않고,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자기를 비우고 내어주고 십자가에 죽는 데 있다.


1-7. 종교다원성을 보는 네 가지 입장


첫째, 우리 것만 옳다는 배타주의(exclusivism).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과거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입장이고, 현 한국 개신교 신자 대부분의 입장이다.

둘째,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대두한 포괄주의(inclusivism)로 교회 밖에도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입장.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는 이런 교회 밖의 그리스도인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불렀다. 교회 밖에서 진실하고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모를 뿐 실제로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최종 완성은 그리스도교로 본다.

셋째, 다원주의(pluralism)인데 모든 종교들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본다. 종교다원주의 하느님중심적 혹은 궁극적 실재중심적 구원관이다.

넷째, 세속주의(secularism)와 회의주의. 종교를 거부하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의 입장은 종교다원주의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 입증은 못하지만 근거를 지닌 하나의 가설로 우리가 길은 다르지만 같은 산을 오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겸손해야 한다. 어느 종교도 하느님을 독점하거나 완전히 알 수 없다.


다원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에 대한 체험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려진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의 이야기도 경청하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는지 점검하고, 우리의 이해를 심화시키며, 배울 점은 배우자는 것이 종교다원주의 신앙이다.



제 2강. 왜 불교와 그리스도교인가


2-1. 왜 그리스도교는 불교와 깊이 대화해야 하는가


두 종교는 교리나 사상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코드가 맞는 종교이자 심층적 문법이 맞는 종교다. 두 종교는 세계성, 보편성을 가진 ‘선교적 종교’다. 이슬람이나 힌두교는 그런 면에서 세계성이 떨어진다.


종교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사회적, 도덕적 기능으로, 한 사회의 기강과 질서의 기초가 되며 집단의 결속력과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른바 ‘질서의 이데올로기(ideology of order)’로서의 기능이다. 모든 종교는 신도수가 증가하여 사회의 다수를 점할 정도로 성공하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사회체제나 가치체계와 영합하여 한통속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는 국교가 되어, 소수 집단이나 자유 사상을 억압하면서 체제 수호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때부터 종교는 생명력을 상실하고 결국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만다.

다른 하나는 본질적인 것으로, 인생의 근본 문제, 개인 실존의 근본 물음에 답을 제시하는 정신적, 영적 기능이다. 종교는 인생의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그 해법을 제시한다. 인간이며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 부조리, 유한성을 넘어서려는 갈망에 종교는 초월적 구원으로 응답한다.


이런 초월적 구원의 종교가 불교와 그리스도교다. 두 종교에는 여전히 그 안에 창시자의 순수한 메시지와 비판 정신이 살아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끊임없이 자기비판과 자기개혁을 할 영적 힘을 지닌 종교다. 두 종교는 인간의 문제, 인생의 문제를 가장 적나라하게 대면하는 가장 ‘라디칼’한 종교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원칙적으로 인간을 차별하지 않는다. 인간을 이 세상의 질서를 넘어서는 초월적 실재와 관계하는 영적 존재로 파악한다. 두 종교의 세계성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초월적, 영적 인간관에 기인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완벽하고 순수한 초월적 구원을 추구하는 종교다. 두 종교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이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철저히 대결하도록 만드는 종교다. 이 순수성과 완벽성은 우리를 언제나 겸손하게 만들며, 사회적 상식과 통념에 의한 안이한 해결에 만족할 수 없게 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윤리는 우리가 도덕주의나 율법주의의 형식적 윤리로 자만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내면의 순수성을 요구한다. 바로 이런 완벽성, 순수성의 추구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매력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높은 이상이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손짓한다.


세상과의 정면 승부, 정면 대결을 하는 두 종교의 모습은 출가 수도자의 고뇌에 찬 결단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 개인에게 이 세상과 정면으로 승부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두 종교는 절제와 금욕의 영성을 지닌 종교다. 초월적 구원을 추구하는 두 종교는 본질적으로 죄악 세상과 탐욕적 세간에 대한 강한 부정에서 출발하여 항시 세상과 긴장 관계를 유지한다. 불교에서는 무상하고 괴로운 세상이 결코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교에서도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는 현세적 질서는 하느님나라의 새로운 질서 앞에서 사라져야 할 구시대적인 것일 뿐이다.


초월적 구원을 추구하는 영적 혁명은 무엇보다도 자기부정에서 시작한다. 불교에서는 무아의 진리를 철저히 깨달아 거짓된 자아와 아집을 버리는 영성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자기부정의 영성이다. 두 종교는 진정한 생명, 진정한 구원은 탐욕과 무지가 판치는 현세적 질서와의 치열한 대결과 철저한 자기부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두 종교 모두 ‘죽어야 산다’는 사즉생(死卽生)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주류 종교인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세상과의 대결과 긴장을 망각하고, 현세적 안락과 물질적 축복을 구하는 기복적 종교로 변질하여 자연인의 욕망과 욕구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일은 참으로 어이없는 아이러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불자나 그리스도인이 된다 해도 우리 삶과 사회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할 것이다.


2-2. 불교의 매력과 대안성


서양의 근대 지성사는 그리스도교 이념이 붕괴된 후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찾으려는 시도였다. 이제 불교가 서구인에게 대안적 이념으로 등장하고 있다. 서구인 대부분에게 그리스도교는 근대와 더불어 사멸했거나 사멸될 수밖에 없는 전근대적 유산이다.


불교는 외적 행위보다 내면을 강조하는 종교다. 전지전능한 인격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의 주체적 노력을 중시하는 종교다.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성과 마음가짐에 의존하는 자기개발과 자기실현의 종교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보다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불교는 인간성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 모든 중생이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믿으며, 원죄 같은 비판적 견해를 부추기지 않는다. 과거의 업 탓은 하지만 그것도 자신의 잘못이기에 조용히 받아들이고 참회한다. 불교는 모든 인간의 성불 가능성을 믿으며 인간성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휴머니즘적 종교다.


불교는 초자연적 진리나 기적 같은 것을 억지로 믿어야 하는 이른바 ‘신앙’의 종교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에 대한 통찰과 지혜를 강조하는 ‘합리적’ 종교다. 불교의 핵심적 진리가 적어도 과학에 정면으로 배치되지는 않으며, 불교를 믿으려고 지성을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


불교는 인간중심주의적 세계관을 벗어나,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고 품는 자연친화적이고 친환경적인 종교다. 개체의 독립성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서로 얽혀 있음을 강조한다.


불교는 그리스도교를 따라다니는 어두운 역사, 즉 폭력과 억압의 역사(이단심문, 십자군전쟁, 종교전쟁, 마녀사냥, 반유대주의의 광기, 사형제, 노예제, 제국주의, 과학적 지식이나 자유사상의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비폭력주의, 평화주의의 종교로서 불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불교는 그리스도교에 비해 타종교에 대해 덜 배타적이고 관용적이다.


윤회 사상, 업보 사상이 지니는 매력도 있다. 업보 사상은 유일회적 인생관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에서 자유로우며, 도덕적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인생고의 문제에 해답을 준다.


불교는 초월적 구원의 종교이면서도 그 초월은 그리스도교처럼 신과 세계, 창조주와 피조물, 신과 인간, 초자연과 자연의 이원적 대립에 근거하지 않는다. 불교의 초월은 내재적 초월, 안으로의 초월이다.


현대인은 역사적 신앙보다는 우주적 영성, 구원사의 드라마보다는 창조 세계의 보존에 더 관심을 둔다. 서구인들은 이제 역사의 진보와 완성보다는 새로운 의미의 초역사적 구원을 갈망한다. 과거의 초자연적 영성과 달리, 우주적 영성의 재발견에서 초월성을 찾고자 한다.


앞으로 현대 그리스도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어떤 하느님 이해, 어떤 그리스도 이해, 어떤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해야 할지 진지하게 묻고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불교와의 진지한 만남과 대화가 필수적이다. 주일학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이해로는 미래가 없다.


제 3강. 불교와 힌두교


3-1. 불교에 미친 힌두교의 영향


다르마 - 힌두교의 집단적 성격, 정체성의 핵심은 사회윤리의 법도인 다르마(dharma)다. 부처님은 힌두교의 다르마 개념을 수용하되 계급제도를 근간으로 하는 신분윤리체제를 부정하고 다르마를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하는 보편적 윤리에 국한시켰다.

해탈 - 해탈은 모든 인도 종교의 특징이며, 윤회라는 인도적 인생관을 전제로 한다. 해탈 사상은 인생 자체를 욕망과 행위에 의한 속박으로 간주한다. 이 속박으로서의 삶은 일회적이지 않고 해탈을 이루기 전에는 나고 죽음을 수없이 반복한다. 인생의 최고 목적은 무욕과 청정한 삶을 통해 악순환을 끊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영원한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해탈이다.

윤회 - 윤회는 자연의 순환적 양상에 따라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행위의 결과를 반드시 치러야 한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업자득의 법칙이 지배한다. 환생에는 모든 생명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 생명의 순환과 대치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


힌두교의 영혼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유한하지만 영원한 개별 영혼이나 개별 자아가 무수히 많다는 견해와, 개별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면서 브라만 혹은 아트만이라는 단 하나의 우주적 영혼 내지 지고의 정신만이 실재한다는 견해이다. 브라만은 ‘우파니샤드’의 중심 개념으로 순수 존재, 순수 의식, 순수 기쁨의 성격을 지닌다. 브라만은 우주 만물의 정수이며 궁극적 실재로, 만물이 거기서 나와 거기로 되돌아가는 알파와 오메가이다.


브라만의 이해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브라만을 인격적 속성을 지닌 대주재신으로 보는 견해다. 대주재신이란, 힌두교 신자 대부분이 주님으로 숭배하고 있는 비슈누나 시바를 말한다. 이러한 숭배가 힌두교의 대중적 신앙이다. 다른 하나는, 브라만을 일체의 인격적 속성을 초월한 실재로 보는 견해다. 브라만을 순수한 존재 그 자체, 순수한 지성 그 자체, 순수한 기쁨과 생명의 근원 그 자체로 본다. 개인 영혼의 실재성을 부인하고 인간 영혼이 우주 만물의 근원인 브라만과 조금도 다름없음을 하는 지혜를 해탈의 지름길로 여긴다.


불교는 윤회와 해탈의 사상에 기반하고 있지만, 교리적으로는 신이든 인간이든 영원한 영혼이나 실체적 자아라는 것의 존재를 부정해 왔다. 이러한 뜻에서는 무신론이나 무아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윤회도 어떤 불변하는 영혼이 옷을 갈아입듯이 몸을 바꾸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러 요소가 일시적으로 결합해서 생겼던 한 개체나 개인이 죽어 해체되면 지은 업에 따라 또 하나의 개체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되는 흐름이 생사윤회다.


3-2. 윤회설의 문제의식과 종교적 함의


윤회설이 수많은 아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어쩔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이나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다. 업보 사상은 인생의 불행을 자기 탓, 자기 책임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둘째는, 인생의 부조리나 불공정성의 문제에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삶의 조건을 하느님이나 다른 사람이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라 자기 업보의 산물이라고 본다. 이런 인식이 부조리한 현실의 개혁 의지를 약화한다는 비난도 받지만, 우리가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불평등한 상황이나 고난에 대해 대처할 수 있게 해준다.


인생의 부조리와 불공평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봉착하는 신앙의 위기가 불교에는 없다. 카르마의 법칙을 믿는 인도 종교들에서는 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자기 탓일 뿐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윤회 사상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한다. 현재 나의 의지와 행위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므로 업보 사상을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업보 사상의 신앙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업보 사상에서는 하느님이 오히려 면죄부를 받고 부담을 덜게 된다. 둘째, 우리가 받는 고난이 하느님의 징벌이라는 잔인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인간을 보는 근본 시각 차이가 두 종교에는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을 백지 상태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영혼을 부여받은 생명이기에 하느님 앞에서 단독자로 살다가 그의 심판대에 홀로 서는 존재로 본다. 이에 비해 윤회 사상은, 현재 내가 ‘나’인 것은 과거로부터 수많은 생을 거쳐온 경험의 결과이며 지울 수 없이 그 흔적을 안고 산다고 본다. 그리고 나의 과거는 결국 무수히 많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망을 통해 형성된 것이다.


현세의 부조리 문제를 그리스도교에서는 결국 부활을 통한 내세, 영생으로 해결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의 부조리 앞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하느님의 자비와 정의를 믿으면서 위로받고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인격적 영생은 해탈의 시각에서는 너무 저급하고 유치한 현세의 연장처럼 보이며, 환생의 시각에서는 지상에서의 억울한 삶을 보상하기에 너무 추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세와 환생과 해탈로 이어지는 인생론이 현세와 영생의 2단계 인생론보다 더 설득력 있고 바람직하게 보인다.


3-3. 그리스도인에게 윤회와 해탈은 무엇인가


엄격히 말해 영혼불멸설이 성서의 사상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플라톤 사상의 영향 아래 오랫동안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인간 안의 어떤 불멸하는 정신이나 혼, 신성, 신적 존재와 생명의 뿌리를 인정하는 종교적 인간관이다. 그리스도교가 환생 사상을 수용 못할 이유는 없다.


불교 인과 사상의 한 가지 문제점은, 도덕적 인과응보는 단순히 전제되기 보다는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상의 도덕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힌두교는 신이 도덕적 인과응보를 주관한다고 믿는다.


비교종교학적으로 볼 때 영생은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인격적 구원관으로 지상에서의 ‘나’라는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산다는 것이다. 둘째는, 대중적 신앙의 힌두교 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현세에서의 ‘나’는 아니지만 유한한 개체적 영혼들이 육체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 무한한 하느님과 사랑의 통교를 나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불교와 엘리트적 힌두교 신비주의 사상에서 주장하듯이 해탈은 개별적 영혼들이 완전히 사라진 어떤 탈인격적인이며 초개체적인 무한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해탈은 해방이며 완전한 자유다. 유한한 육체와 개인적 인격의 탈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무한한 실재의 세계에 들 것이라는 것이 힌두교와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구원관이다. 불교의 무아적 구원관, 초아적 구원관에 의하면 ‘나’라는 자취가 남아 있는 것은 불완전한 해탈이다. 영생은 시공을 넘어서는 초월적 신비의 세계다. 그것을 너무 구체적으로 생각해 온 그리스도교 신앙은 불교와 힌두교의 초월적 해탈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본다.



제 4강. 붓다와 예수


4-1. 불교에 관한 상식 몇 가지


불교를 구성하는 세 가지 기본 요소는 佛, 法, 僧의 三寶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경전은, 부처님 설법을 담은 經藏, 스님들이 지켜야 할 계율을 모아놓은 律藏, 부처님 사상을 철학적으로 부연 설명한 論藏이 있다.


현재 불교는 上座佛敎[小乘]와 大乘佛敎로 나누는데, 경장과 논장은 소승과 대승이 아주 다르고, 율장은 거의 공통이다. 소승 경장은 5부경전으로 부르는데 원본은 팔리어로 되어 있다. 부처님 말씀에 제일 가깝다.


4-2. 인간 붓다와 인간 예수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변화 보다는 인간 존재 자체의 변화, 삶의 태도의 변화를 우선시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제시한 열반의 길이나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나라의 이상이 현실 속에서 어떤 특정한 사회제도나 프로그램으로 실현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 ‘사회성이 약한 종교’, 인간 내면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종교로 보이기도 한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두 뚜렷한 역사적 인물에 의해 시작된 종교다. 그리스도교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관심 소홀은 맹목적 신앙으로 될 위험이 있다. 오늘의 한국 교회의 최대 문제는 예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남았다는 데에 있다. 현대 그리스도교는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 불교는 처음부터 부처님을 한 인간으로 간주해 왔다. 사실 인간 예수도 그랬는데, 교회가 그를 너무 높인 나머지 진리 그 자체, 하느님의 말씀인 로고스 혹은 하느님 자체라고 선언했다.


4-3. 출가와 재가


불교는 각자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해야 하는 종교이고, 주술이나 의례가 없는 종교였다. 불교는 철저히 수행승 위주의 종교로 시작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재가자와 출가자의 구별이 있었다.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의 이중구조가 깨진 예는 일본불교이다. 일본은 13세기에 타력신앙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대처승 제도가 생겨났다.) 부처님도 출가자와 재가자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로 설법을 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그런 구분은 점차 흐릿해지고 있다.


4-4. 불교는 무신론인가


불교는 오직 진리 하나만을 붙잡는 종교, 철저히 진리 중심의 종교다. 불교는 부처를 믿는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의지하여 사는 종교다. 그러나 불교를 단순하게 자기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력 종교’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모든 종교는 진리 혹은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더 크고 무한한 실재에 의존한다. 진리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불교는 우주와 인생이 혼돈이 아니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일정한 법칙과 질서가 존재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긍정하는 종교다.


서양에서 ‘무신론’은 회의주의, 비관론, 허무주의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는 결코 이런 의미의 무신론이 아니며, 이미 존재하는 우주의 철리를 조용히 관조하고 순응함으로써 의미 있게 살려는 냉철하고 지성적인 그리고 겸손한 종교다.


우리가 진리 앞에 겸손할 때 종교에서 ‘자력’이란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진리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지, 나 자신의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불교에서는 이 ‘나’라는 것이 실체 없는 허망한 것이라고까지 한다. 불교가 인생고를 너무 강조한다고 하여 흔히 비관주의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교는 이런 면에서 낙관주의다. 인생이 무상하고 괴롭다 해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있다고 기쁘게 선포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물리적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신비다. 또 물리적 인관관계 뿐만 아니라 도덕적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든 종교가 인정한다. 도덕은 결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세계 자체에 깃들어 있는 질서요 철칙이다. 조선조 우리 선조의 사상을 지배한 성리학에서는 우주 만물과 인간을 설명하는 데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개념을 사용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결코 이러한 도덕적 질서를 믿지 않는다.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우주의 인생의 철리다. 우주와 인생은 우연이나 혼돈이 아니며 무의미한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어진 영원불변의 힘을 깨닫고 거기에 따라 수행하는 불교를 단순하게 ‘자력 종교’라고 하는 것은 경박한 생각으로 보인다.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에 따라 살려는 사람은 누구든 넓은 의미에서 ‘유신론자’라 할 수 있다. 과학적 진리든, 도덕적 진리든, 부처님의 법이든, 모두 신비이고 ‘은총’이 아닐까?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동양 사상이 심오하지만 한 가지 약점은 우주 만물에 내재하는 법칙과 질서와 조화의 원인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은 사물과 사물 사이의 수평적 관계로 모든 것을 파악하는데, 수직적 관계, 사물의 존재의 기원이나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는다. 이것이 불교를 좋아하면서도 궁극적으로 불교 사상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또한 우주 만물의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러한 우주와 인생의 철리를 깨달을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지혜와 지성, 그리고 사람들이 로고스(Logos)라 부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한없이 신비스러운 사실이다. 그러한 인간의 능력도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기에 함부로 자력을 논해서는 안 된다.


동양 사상에서는 자연 너머의 ‘초자연적’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았지만, 동양의 자연주의를 서양의 무신론적 자연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동양적 자연주의에는 창조주 하느님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깊은 영성과 종교성이 있다. 그러나 서양의 자연주의는 초자연적 신을 부정하는 맥락에서 나왔기 때문에 무신론, 유물론, 기계론적 자연관으로 흘러갔다. 현대적 관점에서 이것이 종교적 위기의 뿌리고, 환경 위기의 사상적 뿌리이다.


부처님은 대중 신앙이나 토착 신앙을 무지한 것으로, ‘우상 숭배’로 정의하거나 배척하지 않았다. 적어도 다신 신앙이나 신령 숭배에 관한 한,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다만 우주의 궁극적 원인이며 주재자인 인격적 창조주 하느님의 존재는 부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이고 유일신 신앙과 배척된다.


4-5. 붓다와 예수의 닮은 점


<부처님과 예수님의 공통점 >

가정을 버리고 떠돌이 생활을 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독신, 무소유, 무욕의 삶을 살면서 열반과 하느님나라라는 초월적 실재와 가치를 추구했다.

절대적 평화주의자로서 증오와 폭력에 반대했으며, 무차별적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고 실천했다.

지혜의 교사로서 사람들의 탐욕과 권력의 허상, 허위의식과 환상을 깨우치고 인생의 실상을 보게 했다.

비유의 명수로서, 초월적 구원의 진리를 알기 쉬운 비유로, 짤막한 경구로 설명한 명교사였다.

기존 종교계의 공식적 직함을 갖지 않은 자유로운 사상가였다.

그들의 권위는 학습이나 교육이 아니라 궁극적 실재에 대한 직접적 체험에서 나온 카리스마에 근거하고 있다.

이론가나 철학자가 아니라 실천가였으며, 비밀스러운 교설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열린 메시지를 설파했다.

마음의 근본 자세, 즉 회개, 전향, 깨달음을 강조했으며 내면의 윤리를 강조했다.

인간의 근본 문제를 현실 안주와 자기중심적 삶에서 보았으며, 사회의 질서나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의 종교 전통을 개혁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세주 예수를 너무 숭상하는 나머지 제자들을 가르치고 인생의 참된 길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지혜와 통찰, 가르침과 사상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을 통해서, 부처님은 진리와의 두려움 없는 대면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셨다. 두 분 다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무엇인가를 통해 ‘나’라는 존재를 단단한 벽으로 둘러싸 안전을 도모하려는 인간의 이기심과 어리석음을 깨트린 분들이다.


부처님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도 깨달음, 각성, 자각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부처님과 예수님의 가르침의 말씀에는 공통되는 점이 매우 많다.



제 5강. 자기로부터의 해방


5-1. 무아적 삶


부처님과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초월적 구원의 세계를 제시하고 인간 존재와 세계의 철저한 변화를 촉구한 것이다.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단순히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세간적 삶의 방식, 세상적 질서의 연장이나 변형이 아니라 그것의 라디칼한 부정과 초월을 통해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세계다. 가치의 완전한 전도가 이루어지는 세계다. 불교에서는 그런 세계를 ‘초세간적’이라 부르며, 그리스도교에서는 ‘종말적’이라 부른다.


종말의 세계는 바로 지금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세계다.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세계이며, 감추어져 있으나 지금 여기에 실재하는 세계다. 그것은 마음이 깨끗한 자,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영적 세계다.


열반과 하느님나라가 실현되려면 세상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꾸는 영적 혁명이 필요하다고 부처님과 예수님은 가르치셨다. 자기중심적 삶에서 벗어나는 무아적 삶이 중요하며, 부처님과 예수님은 바로 이 무아적 삶, 즉 자기로부터의 해방을 완벽하게 보여주신 분들이다.


예수님에 의하면 자비와 은총의 아빠 하느님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긍정의 하느님으로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의 충족을 요구하거나 우리가 무엇을 성취해야만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떠나 자기 몫을 챙기려는 부질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빠 하느님의 품에 안겨 어린 아이처럼 기쁘고 자유롭게 살 것을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자기 부정을 통해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 된 존재였고, 자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기에 하느님의 빛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같이 투명한 존재였다.


5-2. 괴로움의 진리


불교에서는 세 종류의 고(苦)을 말한다.

첫째는 고고(苦苦)로,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다. 팔고(八苦) 중 일곱 가지에 해당되는 상식적인 괴로움이다.

둘째는 괴고(壞苦)로, 행복한 경험이라 할지라도 순간적이고 변하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다. 행복함도 지속적이지 못하고 곧 사라져버리기에 허무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셋째는 행고(行苦)로, 이는 존재론적 괴로움이다. 괴로움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필연적 속성이다. 모든 유위법, 즉 조건에 의해 생성 소멸하는 사물들은 본성상 괴로움이며 슬픔이다. 곧 사라질 것들은 모두 슬픔을 안고 있다. 그리스도교식으로 말하면, 모든 피조물은 덧없이 사라질 것이기에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는 이것을 일컬어 ‘피조물적 감정’이라고 했다. 이것은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공유하는 깊은 감정이다.


고(苦), 무상(無常), 무아(無我)는 불교의 대표적 인간관, 인생관, 세계관, 그리고 존재론이다. 이 셋을 불교에서는 삼법인(三法印)이라고 한다. 이런 덧없는 세상에 대한 자각은 불교에서는 해탈을 향한 갈망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무아설은 부처님의 최대 철학적 발견이다. 부처님은 이 무아의 진리를 통해 수많은 사람을 자아라는 미망으로부터, ‘나’라는 아집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인간은 수시로 변하는 여러 요소의 임시적 결합체일 뿐, 그러한 요소들 배후에 어떤 항구적인 ‘자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부처님은 철저히 현상론적 인간관을 갖고 계셨다. 항시 변하고 있는 현상적 인간 존재의 배후에 ‘자아’라는 항구적인 실체 내지 본체라는 건 없다는 인간관이다. 그러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견해야말로 모든 아집과 번뇌의 근원이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실체적 존재가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항시 변하고 있는 과정이나 흐름으로서의 존재일 뿐이며, 공간적으로는 여타 사물들이나 인간들과의 상호작용과 관계를 통해 그때그때 형성되어가는 관계적 존재일 뿐이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면서도 초월자 하느님과 관계하는 인격의 깊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인간 안에 있는 어떤 신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별적 영혼이나 실체가 아니라 우주적 신적 정신인 아트만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모든 자기중심성, 이기성의 원인이 되는 개별적 자아의 실체성은 부인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오온으로 구성된 자신을 거부하고 생사의 세계에 유전하는 자기 자신을 초월하려는 마음, 본래부터 깨끗한 마음이 존재한다고 소승 경전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 등으로 부른다. 대승불교 후기에 오면 무아설을 하나의 불완전한 이론, 하나의 방편설로 간주했으며, 무아설의 취지를 잘 이해하면 오히려 부처님은 더 높고 크고 참된 자아를 가르쳤다고 하여 정통 베단타 사상에 근접하고 있다.


5-3.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 괴로움의 발생 원인을 밝힌 진리로서 고통은 끝없는 욕망, 갈애, 타는 목마름에서 온다는 가르침이다. 갈애로 인해 집착이 생기고, 집착으로 인해 업을 짓고, 업으로 인해 업보를 받아 계속해서 생사윤회의 세계에 묶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고를 산출하는 갈애의 원인과 결과, 그 반복적 지속과 악순환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 연기설(緣起說)이다. ‘연기’란 모든 현상이 선행하는 조건[緣]에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개념으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통찰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가 생사의 바다에 빠져 유전하는 과정도, 자세히 살펴보면 조건적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반복적 과정이다. 이 끝없는 반복적 과정을 편의상 과거, 현재, 내세의 삼세로 구분하여 밝혀놓은 것이 ‘12지 연기설’이다.


중요한 것은 12개의 고리가 조건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끊으면 차례로 나머지 모든 고리가 저절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2개의 고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다시 말해 고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 무지이다. 이 무지를 제거하면 고의 종식,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 부처님의 핵심적 메시지다. 이것이 세 번째 진리, 고멸성제(苦滅聖諦)다.


이런 고통의 종식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르는가를 설한 것이 네 번째 진리인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다. 부처님은 고의 종식으로 가는 길로서 팔정도(八正道)를 제시한다.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으로 묶이는데, 불교는 간단히 말해서 이 삼학을 통해 인격의 변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인간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과 흐름으로서의 존재이기에, 탐욕으로 더러워진 탁류를 삼학으로 정화하여 깨끗한 존재로 바꾸려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다.


계(戒)는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행위를 말한다. 재가자는 5계, 사미승은 10계, 비구승은 250계, 비구니승은 348개를 지켜야 한다.

정(定)은 정신을 하나로 집중하여 산만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맑게 하는 수행이다. 정은 깊이에 따라 4단계 혹은 8단계의 선정(禪定)이 있다.

혜(慧)는 지혜로, 사물과 인간 존재에 대한 올바른 통찰력이다. 고, 무상, 무아의 진리를 철저하게 꿰뚫어보는 통찰이다.


계, 정, 혜를 통해 인격이 완전히 변화된 존재, 완전히 깨끗해진 성자를 소승불교에서는 아라한(阿羅漢)이라 부른다. 부처님과 다름없는 존재로, 누구든 수행을 통해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아라한이라는 완전한 인격이 도달한 경지, 그들이 경험한 세계 내지 실재가 열반이다. 그것이 수행의 종착역, 불교의 궁극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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