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보살예수(2)

샌. 2007. 10. 25. 09:02

제 6강. 열반과 하느님나라


6-1. 현생 열반과 하느님나라


계, 정, 혜 삼학을 닦아 완전해진 인격이 도달하는 경지, 경험하는 세계 혹은 실재(reality)가 열반이다. 하느님나라가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이듯, 열반은 불교의 존재 이유이다. 열반은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三毒)으로 대표되는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 상태, 욕망의 불이 완전히 꺼진 상태, 즉 완전한 무욕과 평안의 상태를 가리킨다. 생사윤회의 과정이 더 이상 굴러가지 않도록 무지와 갈애와 업이 사라진 세계로서, 생사의 유전과 흐름이 완전히 정지될 때 실현되는 초월적 경지다.


고의 종식인 열반에는 유여의(有餘依) 열반, 무여의(無餘依) 열반 두 종류가 있다.

현세에서 몸을 가진 채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증득하는 것이 유여의 열반(현생 열반)이고, 몸이 소멸한 뒤에 주어지는 것이 무여의 열반(사후 열반)이다. 이것이 완전한 열반, 즉 입멸(入滅)이다.


현생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우리가 아는 세간적 질서가 아닌 초세간적 질서, 종말적 질서하는 데서 일치한다. 무지와 탐욕, 경쟁과 다툼, 권력과 억압의 역사가 사라지고 초세간적 자비와 평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평화가 지배하는 세계를 말한다. 무엇보다도 무지와 탐욕으로 구축된 자아의 좁은 담들이 무너지고 초월을 향해 활짝 열린, 아니 초월과 완전히 하나 된 무아적 세계다.


열반이든 하느님나라든 자기부정, 자기포기, 자기초월 없이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 세계다. 죽음을 통해서만 얻는 사즉생(死卽生)의 세계이면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영생이다. 열반과 하느님나라는 사후에야 비로소 주어지는 세계이기 전에 ‘지금 여기서’ 삶의 질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 세계이며 영생의 세계다.


그러나 열반과 하느님나라의 다른 점은 예수님이 제시한 하느님나라의 비전은 부처님이 제시한 열반의 비전에 비해 공동체성과 사회성이 더 강한 반면, 열반은 하느님나라에 비해 초월성이 더 강하다. 하느님나라와 열반은 둘 다 근본적으로 초세간적, 초역사적 세계이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현재 우리의 사회적 정치적 관심이나 행위와 어떤 연계성을 가지느냐 하는 데서 차이가 있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정의보다는 자비가 강조되는 경향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열반은 경험하는 자에게는 ‘객관적’ 실재이지만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다. 초월적 실재, 감추어져 있는 실재로서 영적 눈이 있는 자만이 발견하고 경험하는 세계다.


6-2. 사후 열반과 하느님나라


영생을 인정할 때 핵심적 문제는 현세와 사후 영생 사이에 얼마만큼의 연속성과 얼마만큼의 질적 단절이 존재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통적으로 세계와 역사의 최종적 완성을 믿는다. 죄악과 갈등과 죽음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이 세계, 이 역사가 완전히 변화되어 새로운 세계로 완성될 날이 온다고 기다리는 종말적 신앙이다. 이 그리스도교의 종말의 비전은 불교의 사후 열반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세와의 연관성이 강하다. 사후 열반은 현재의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진 세계인 반면, 사후 하느님나라의 영생의 세계는 지상에서의 ‘나’의 정체성이 어떤 형태로든 보존되는 세계로 이해된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직 괴로움을 종식시킬 방도만 가르쳤지 사후 열반의 세계의 유무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불교의 궁극적 구원인 사후 열반은 그리스도교의 사후 구원인 부활을 통한 영생과 대비된다. 열반은 ‘나’라는 것이 없는 무아적 구원인데 반하여,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사후 하느님나라의 영생은 하느님의 품 안에서 주어지는 영원한 평화이며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오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이지만 ‘나’라는 개인 혹은 인격이 어떤 형태로든 존속하는 구원이다. 그러나 열반의 해탈은 인격적 구원이 아니다.


하느님나라는 갓난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으로 하느님을 대하며 하느님과 하나 되는 자들의 세계일 것이다. 지상에서의 모든 기억이 사라져 행복과 불행의 경험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세계, 불교식으로 말해 무심, 무념, 무아의 세계가 아닐까? 그것이 반드시 인격적 구원일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려면 지상에서의 개인적 기억이 다 사라져야 하고 육체라는 옷, 인격이라는 특수성과 우연성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버려야 한다. 어떤 신비주의자들은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원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일체의 번뇌가 사라진 열반이라는 실재와 하느님나라라는 초월적 세계를 통해서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을 넘어 영생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지금 여기서 이미 그것을 맛볼 수 있고 사후에는 더 완전무결하게 경험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절대적 무욕과 평화의 세계인 열반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사후 영생을 현세의 연장 내지 완결판으로 보는 유치한 구원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제 7강. 공과 하느님


7-1. 공(空)이란


대승과 소승을 구별해 주는 것은 보살 사상 내지 보살 신앙이다.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갖추고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고자 결심한 존재이기에, 보살이 추구하는 열반은 생사와 대립적일 수 없다. 생사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활동하는 보살은 생사를 떠나는 열반보다는 바로 생사 속에서 열반을 찾는다. 그러므로 보살에게는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는 지혜가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지혜다.


대승은 무아에서 더 나아가 일체 사물과 현상의 무실재성을 말한다. 이런 사물의 성격을 말해주는 것이 공, 무실체설, 무자성, 의타성, 연기성 등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물과 현상이 각기 차별적 존재성과 본성을 지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두가 그 자체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존재성과 성품이 없는 빈 존재라는 뜻이다. 공은 사물의 이러한 본성이다. 그래서 그것을 단순히 진여(眞如), 즉 ‘그러함’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사물이 상호 의존적이기에 그 자체의 존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은, 달리 표현하면 사물 사이의 차이와 거리가 궁극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중국 화엄철학에서는 이럴 사사무애(事事無碍),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로도 표현한다. 우리는 언어와 개념의 마술에 홀려, 마치 사물 간의 차이가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는 사물이 그 이름에 해당하는 고유의 차별적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분별심(分別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공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다. 공을 언어로 설명하는 자체가 모순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한다. 진제는 언어와 분별과 사량(思量)을 떠난 궁극적 진리, ‘말을 떠나고 생각을 끊은(離言絶慮)’ 진리를 가리키는 반면, 속제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한 진리다. 언어에 입각한 진리 인식이 불완전하기 하지만, 언어를 초월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인식조차도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속제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자신에 머물거나 자신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언어의 존재 이유는 언어가 필요 없고 발붙일 곳 없는 세계를 드러내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말 없는 말, 설법 아닌 설법이 부처님의 설법이다


7-2.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공은 존재론적으로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非有非無)’ 중도적 실재다. 공은 사물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유 아닌 유로서, 묘유(妙有), 또는 가유(假有)임을 뜻한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도 마찬가지다.


바로 이와 같은 공의 논리에 의해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을 생사의 세계를 떠나 따라 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승불교에서 보는 생사와 열반의 이원적 대립이 극복된다. 생사와 열반은 따로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가 보기 여하에 따라 생사도 되고 열반도 된다. 번뇌와 보리, 부처와 중생도 마찬가지다. 일체의 대립과 차별이 사라진다.


그러나 대승 공관(空觀)은 평등성과 차별성, 차별성의 부정과 긍정을 균형 있게 동시에 취한다. 공은 평등성 못지않게 차별성의 세계다. 만물이 모두 자성을 결여한 실속없는 빈 존재라는 점에서는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제각기 독특한 모습과 이름으로 차별성을 연출하고 있다. 부처와 중생이 다르고 열반과 생사가 구분되며 현명한 자와 무지한 자의 차별이 인정된다. 사물 간의 차별을 절대화하지 않고 그 밑바닥에 깔린 평등성을 망각하지만 않는다면 차별성이 있는 그대로 긍정되어도 무방하다.


공이란 사물의 차별성만을 습관적으로 강조해온 우리의 무지가 사라지고 지혜의 눈으로 본 평등의 세계다. 공은 우리의 사회적 고정관념을 부정해버리기 때문에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모든 언어적 판단과 활동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모든 주의, 주장, 이념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힘을 지녔다. 공은 어떤 ‘입장’이나 ‘주의’나 주장이 아니다. 심지어 공이라는 개념조차도 발붙일 곳이 없다. 그런 공은 매우 예민한 개념으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7-3. 공관의 신학적 의의


두 가지 측면에서 공의 그리스도교 신앙적 신학적 의미를 성찰한다. 첫째는 공을 피조물 세계 일반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로서 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공이 그리스도교의 신관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것이다.


공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사물을 바로 보고 바로 대하는 지혜를 제공해준다. 그리스도교에서도 하느님 외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덧없고 상대적임을 인정한다. 공관의 실천적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덧없고 상대적인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데 있다. 공관은 우리가 사물의 차별상에 집착하는 것을 막아준다. 공은 일치와 평등의 관점에서 피조물의 세계를 새롭게 보게 한다. 공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의타적으로 존재하는 가유(假有)인데, 그리스도교 언어로는 모든 존재는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하느님 안에 존재 근거를 갖고 있으며, 하느님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존재를 부여받았다는 말이다.


공은 우리에게 사물의 순수하고 원초적인 모습을 드러내 줄 수 있다. 공은 세상 모든 사물을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으로부터 해방해주고, 우리의 과다한 욕구와 요구가 피조물에게 부과한 중압감을 덜어준다. 공관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과 성취욕이 빚어내는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해체한다. 공은 무엇보다도 사물의 상호 의존성과 상통성을 말해준다. 공의 진리는 인간이 결코 세계의 주인일 수 없음을 말해주고 생태계의 질서와 창조 세계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는 사물의 존재를 다른 사물과의 상호 의존성이라는 수평적 관계에서만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허무성을 안고 있는 사물을 그럼에도 존재하게 떠받치고 있는 어떤 절대적 존재 내지 근원적 실체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데 있다. 이 두 상이한 실재관은 양립할 수 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각기 자기 방식으로 궁극적 실재를 경험하고 이해해 왔다. 한쪽은 공이라는 부정적 표현으로, 다른 쪽은 절대유 같은 긍정적 표현으로 하느님을 이해해온 차이는 있지만, 양자 모두 인간이 유한한 사물에 만족하지 않고 만물을 아우르는 무한하고 절대적인 실재를 추구한다는 데서는 일치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공관을 그리스도교의 신관으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을 수 있고, 공관이 신관을 정화하고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고, 공관이 신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하느님 혹은 실재가 궁극적으로는 우리 인간의 사유와 언어를 초월하는 신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와 무의 두 개념을 갖고 노는 우리의 사고가 제 아무리 재주를 피워 비유비무를 논하고 절대무, 절대유를 들먹여도 하느님은 결국 절대무로도 절대유로도 잡힐 수 없는 신비이며, 인간의 모든 개념은 이 신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에서 나온 미약한 시도일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제 8강. 보살예수


8-1. 보살이란 어떤 존재인가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陀)의 약칭으로, 깨달음(bodhi)을 구하는 존재(sattva)라는 뜻이다. 본래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성불하시기 전의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바로 이 성불 이전 보살로서의 부처님의 삶을 모두가 본받고자 한다. 보살은 대승불교가 지향하는 이상적 인간형으로서, 대승 운동의 주창자들은 당시 소승이 지향하던 아라한의 이상을 비판하고 보살의 이념을 대안으로 들고 나왔다. 대승은 부처님의 자비의 정신을 회복하자는 운동으로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고루 갖추어, 생사의 세계를 두려워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중생 구제에 헌신하고자 하는 존재이다.


보살은 자신만의 해탈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이로움과 타인의 이로움을 동시에 추구하는 자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도 자신의 해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여 함깨 생사의 세계를 벗어나기 위함이다. 보살은 다른 말로 하면, 생사의 세계와 열반의 세계에 동시에 몸담고 있는 존재이다. 보살이 구하는 열반은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으로 머묾이 없는 열반이며 열반 아닌 열반이다.


보살이 되려면 먼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하며[發菩提心], 이것은 자신의 성불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런 다음 지혜와 자비를 갖추는 수행이 필요하다. 보살의 수행은 여섯 가지 덕목인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닦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지혜가 가장 중요하다. 이와 같이 대승불교는 대중의 종교적 욕구를 수용하여 불보살을 신앙하는 신앙적 불교를 발전시켰다. 엄격한 자업자득의 소승불교와는 다르게, 중생을 구제하는 초월적 존재를 믿는 대중 불교로 변모했다.


보살의 지혜는 무엇보다 불이지(不二智)다. 자와 타, 보살과 중생, 번뇌와 깨달음, 생사와 열반, 차안과 피안, 진과 속, 성과 속이 둘이 아님을 아는 지혜다. 보살은 이러한 지혜로 무장하고서 보살 노릇을 할 수 있으며, 진정한 자비를 실천할 수 있다. 보살은 모든 차별을 부정하고 초월하는 평등지(平等智) 위에서 다시 일상적 차별의 세계를 긍정하는 차별지(差別智)를 발휘함으로써 중생 구제에 임하는 것이다.


8-2. 보살예수론


보살의 모습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예수님의 모습에서 불자들은 보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당신은 보살 중의 보살이십니다.” 하고 답할 것이다.


그리스도론이란, 예수님은 누구인지 그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그가 신앙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고찰하는 신학의 분야다.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주님’ ‘로고스’ 등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에 대한 다양한 칭호들은 본래 예수님 자신이 사용한 것이 아니고, 그의 부활 이후 그를 믿고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해한 바를 담아 붙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를 그리스어로 번역한 말인데, 사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존재였다. 그런데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며, 종래의 그리스도의 개념을 확 바꾸었다.


예수님이 만약 불교 문화권에서 탄생했다면 틀림없이 자비로운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시아인이 우리의 언어로 독자적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면, 이러한 아시아적 그리스도론의 한 중요한 형태가 ‘보살예수론’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8-3. 예수의 자유와 보살의 자유


첫째, 보살은 생사의 세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다. 보살이 보기에 현실이란, 우리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허구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도 현실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이셨다. 예수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란 결코 안주하거나 집착할 만한 곳이 못 된다. 예수에 의하면, 절대무상의 은총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우리의 모든 현실적 계획은 필요도 없고 부질없는 짓이며,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모든 정신적 노력도 헛된 일이다.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근심 없이 살아야 할 행복하고 자유로운 존재임을 그는 친히 보여주셨다.


둘째, 보살은 생사의 세계만 아니라 열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다. 보살이 진속을 가리는 소승적 지혜로부터 자유롭듯이, 예수도 유대교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사랑의 이름으로 종교적 금기와 담을 과감히 허물었다. 예수는 아빠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서 인간의 모든 독선과 편견이 무너지는 것을 보여주셨으며, 하느님 자녀의 자유를 선포하고 실천했다. 예수의 자유는 보살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종교로부터의 해방이고 자유였다.


셋째, 보살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아의 존재다. 이는 예수도 마찬가지다. 보살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깨닫는 지혜로 인해 아집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라면, 예수는 절대무상의 은총의 하느님, 무조건적 사랑의 하느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놓아버린 무아의 존재다. 무아적 존재는 참다운 자아, 진아를 되찾은 존재다. 예수에 있어서의 진아도 아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근심 없이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 이웃과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는 관계적 존재이며 의타적 존재다.


8-4. 예수의 사랑과 보살의 자비


세계와 인생을 달리 보는 초월적 지혜가 없는 한, 세상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뛰어넘는 자유가 없고 진정한 자비와 사랑도 불가능하다. 보살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은 세상에서 생각하는 상식적 윤리가 아니라, 공과 하느님이 은총에 대한 영적 통찰과 깨달음, 그리고 거기서 오는 무아적 진리의 자각에 근거한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과 자비다. 예수와 보살은 물론 이와 같은 초월적 평등지(平等智) 만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아니다. 평등을 잃지 않는 차별 속에서 예수는 죄인과 병든 자,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찾고 보살은 고통당하는 중생의 탄식과 신음을 듣는다.


예수의 아가페와 보살의 자비는 확실히 상이한 사회적 문화적 배경과 종교 전통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구체적 표현과 실천도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양자 모두 초월적 지혜와 무아적 진리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그것은 일찍이 인류가 실현하고자 했던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도덕적 힘이며, 무지와 탐욕으로 병든 세계를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힘이다.


8-5. 공과 하느님의 사랑


예수의 자유와 사랑은 그가 전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을 맡긴 아빠 하느님의 절대무상의 사랑과 은총으로부터 온다. 이와 같은 은총의 하느님에 대한 자각과 신뢰야말로 예수에게 무위진인(無位眞人) 같은 거침없는 자유, 원수까지 사랑하는 절대적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힘이다. 보살의 자유와 자비는 일체의 상을 여윈 공, 그러면서도 동시에 일체의 상을 허락하는 공의 지혜, 즉 반야지에서 온다.


그렇다면 공과 사랑의 하느님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실재를 가리키는 말일까? 하느님의 사랑은 인격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만물의 보편적인 존재 원리이고, 공은 사랑의 존재론적 개념이며 사랑은 공의 인격적 언어이다. 우주와 인생의 실상은 사사무애와 이사무애의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곧 공의 세계이고 사랑의 세계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로고스의 보편성을 믿는다. 그것은 만물의 창조와 생성 이전부터 선재해 있는 만물의 창조 원리요, 존재 원리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 로고스가 바로 예수라는 한 역사적 존재에서 집중적이고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믿으며, 나아가서는 예수를 로고스의 육화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로고스는 예수나 보살과 같이 참다운 자유와 사랑이 실현되는 곳 어디서나 작용하는 힘이며, 그것 없이는 만물의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는 우주의 궁극적 힘이고 원리다.


공은 곧 하느님의 사랑이며 로고스라고 믿는다. 공과 하느님의 사랑은 로고스라는 동일한 실재를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와 보살은 바로 이 힘을 통해 한없는 자유인이 되었고 무아적 자비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이 힘은 오늘도 수많은 작은 예수와 작은 보살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접하는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이제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너희는 나를 누구냐?” 하는 예수의 질문에 과감하게 “당신은 우리 아시아인의 마음을 그토록 오래 사로잡아온 보살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시는 분이며, 지금도 고통 받는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고 있는 자비로운 보살입니다.” 하고 고백해도 좋을 것이다.



제 9강. 불성과 하느님의 모상


9-1. 선(禪)이란


선불교는 인도의 불교 사상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이야기하는 중국의 도가 사상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형성된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서, 동아시아 불교의 꽃이며 동양 정신의 정수다. 선불교는 대승불교 사상을 배경으로 하며, 그 가운데서도 특히 공 사상과 불성(佛性)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으며, 도가의 정신이나 신비적 직관주의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선의 특징은 그 사상에 있다기보다 진리에 접근하는 독특한 방식에 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등과 같은 표어들은 모두 진리를 언어와 문자의 매개 없이 직접 깨달아 알 것을 강조한다. 선의 근본 정신은 진리를 관념적으로 혹은 개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혹은 온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다.


선은 공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넘어서 존재의 가장 원초적 모습을 불성(佛性), 진심(眞心), 진여(眞如) 등 긍정적 언사로 표현한다. 선에서는 진리를 대상화하지 않고 바로 생각의 자취가 끊긴 나의 마음 자체에서 찾는다. 본래적 나의 발견, 참나[眞我]의 회복이 선의 본령이다. 이 진아는 일찍이 부처님이 부정한 개인의 실체적 자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인간 본연의 성품이어서 인간의 보편적 자아, 무한한 자아, ‘나’ 아닌 나를 가리킨다.


선의 독창성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본래면목을 회복할 수 있는지의 접근법에 있다. 어떻게 해야 망심에 가린 진심을 드러낼 수 있으며 거짓자아에 싸인 참자아을 해방하는가 하는 문제다. 6조 혜능 이후 중국 선의 정통을 차지하게 된 남종선(南宗禪) 전통에서는 점차적 수행법을 거부하고 돈오(頓悟) 혹은 견성(見性)의 기치를 들고 나왔다. 즉 한순간 대번에 깨쳐 자기 마음의 본성을 보면,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끝난다는 것이다. 단칼로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는 단도직입(單刀直入)의 정신이 중국 선의 기본 정신이다.


깨닫고 나면 아무런 닦을 것도 부족할 것도 구할 것도 없으며, 구할 것이 없기에 얻는 것도 없다. 선의 극치는 바로 이러한 ‘무소구 무소득(無所求 無所得)’의 경지에 있다. 본래 아무 문제도 없는데 우리가 공연히 자승자박하고 있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더럽히려야 더럽힐 수 없는 순수한 본래성의 자각이야말로 선의 본령이다.


선은 처음부터 완벽을 요구한다. 시작부터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깨닫든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점진적 과정이나 구체적 방법론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돈오주의 정신이다. 선사들은 상식을 뒤엎는 언행을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본바탕, 자기 안에 이미 존재하는 진리에 눈을 뜨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선문답이나 방(棒), 할(嗐), 춤 등 각종 기행 혹은 폭행에 가까울 정도의 ‘행위언어’를 동원해서 수행자가 정신이 확 들게 만든다.


12세기 중국 선에서는 임제종(臨濟宗)의 대혜(大慧) 선사에 의해 옛 선사들의 문답인 화두(話頭) 혹은 공안(公案)을 갖고 종일 씨름하는 간화선(看話禪)이 유행하게 되었고, 그 후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선 수행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간화선의 핵심은 수행자가 생각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선문답을 갖고 씨름하면서 절망에 가까운 궁지에 몰리다가 극적 탈출구를 발견하는 깨달음의 경험이다.


선은 자신의 본심과 본래면목을 깨닫는 돈오로부터 시작한다. 돈오는 인식의 일대 전환으로써 본래부터 있는 진리를 깨닫는 것일 뿐이지 새로이 무엇을 첨가하거나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피조물이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첫 순간의 순수하고 완벽한 세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사고와 탐욕에 의해 물들지 않은 아름다운 세계, 하느님나라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9-2. 참사람


선불교를 위시하여 모든 동양 사상의 핵심은 참다운 인간성의 실현에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구원도 죄에 물든 인간이 하느님이 창조한 본래 모습 그대로의 본래적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하느님을 쏙 빼닮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야말로 하느님이 모상 그 자체이며, 인간의 인간성을 가장 순수하고 완벽하게 드러낸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궁극 목표도 동양 종교와 마찬가지로 본래적 인간성을 실현함으로써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이 본래의 인간성을 되찾고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의 본성인 불성이 드러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교 또한 깨달음의 종교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믿음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보다는 오히려 사랑과 은총의 하느님에 대한 깨달음을 더 중시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은총의 하느님을 우리가 깨닫도록 말씀으로 가르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중요한 사명이었으며, 목회 활동의 핵심이었다. 절대무상의 은총의 하느님은 예수님에게는 믿음의 대상이기 앞서 깨달음의 대상이었다.


선사들이 지향하는 세계나 예수님이 지향하는 세계나 모두 참다운 인간이 되려는 것이다. 구원 혹은 해탈이란, 곧 본래적인 순수한 인간성의 발견과 실현이다. 이 참다운 인간성의 발견과 실현은 무엇보다도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지, 즉 나의 참자아에 대한 자각으로 시작된다. 선사들은 이 참자아를 공과 불성의 진리를 통해 깨달으며,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은 사랑과 은총의 아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각한다. 사랑의 아빠 하느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고 어린아이처럼 무념, 무심, 무아의 존재로 자유롭게 살아간다.



제 10강. 자력과 타력


10-1. 정토 신앙


동아시아 불교의 주류는 선불교와 정토왕생(淨土往生) 신앙이다. 정토 신앙은 본래 인도에서 시작한 것이지만 일본에서 신앙적이나 사상적으로 꽃을 피웠다. 정토 신앙의 목적은 사후에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더러운 땅인 예토(穢土)를 떠나 고통과 유혹이 없는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태어나 거기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성불하려는 데에 있다. 이 가운데 핵심은 지극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염불(念佛)이다.


정토종 개창자인 호넨(法然, 1133-1212)은 철저한 전수염불(專修念佛)의 주창자로, 불교의 다른 수행법을 물리치고 오로지 염불에만 전념하도록 가르쳤다. 제자 신란(親鸞, 1173-1262)은 스승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마저도 수행하기 어렵다고 하고, 중생 구제를 위해 이미 모든 것을 성취해 놓은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의 힘에 의지하는 신심만을 유일한 길로 내세웠다. 그는 구원이 아미타불에 의해 주어진다는 극단적인 타력 신앙을 주창했다. 신란은 자신의 해탈을 위한 모든 노력과 꾀를 완전히 포기하고 오직 아미타불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는 타력 신앙의 진리를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선한 사람도 왕생하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하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10-2. 종교에 자력이란 없다


무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선에서 깨달음의 경험이 과연 자력에 의해 가능할까? 깨달음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주어지는’ 것이지 나의 성취는 아니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선물이고 은총이다. 본질적으로 자력 종교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종교는 인간 존재와 생명의 근거가 자기 자신에 있지 않고 자기를 초월하는 어떤 무한한 실재에 있음을 말한다. 그것이 하느님이든 공이든 불성이든. 혹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이든, 우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삶의 기반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믿는 건 종교가 아니다.


불자들이 우주만물의 제1원인으로서 하느님이라는 궁극적 실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해도, 적어도 질서와 존재의 신비만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를 자력 종교, 무신론적 종교라고 부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10-3. 궁극적 실재의 인격성과 탈인격성


불교나 동양 사상에서는 대체로 우주의 궁극적 실체를 사람의 인격성에 준해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인격신관은 도덕적으로도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인간의 이기적 욕망이나 편견을 신에게 그대로 투사해서 자기들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유혹에 항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우리가 인간이나 여타 피조물에 대하여 사용하는 언어가 하느님에게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신과 세계 사이에는 단절과 차이 못지않게 어느 정도의 연속성과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성이 지닌 위대성과 신비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음성은 오직 침묵과 ‘허공’ 속에서만 진정으로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불교를 통해 배운다. 무념과 무심이 아니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다운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무상의 하느님이 아니고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해준다는 인격신은 인간의 편견을 조장하는 편협한 존재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하느님의 언어가 자칫 나의 언어로 둔갑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잡소리로 변질될 위험이 ‘계시 종교’에는 늘 도사리고 있다. 불교의 매력은 어디까지나 이 무념, 무심, 무상, 무언이라는 ‘없음’과 ‘비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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