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부패의 힘 / 나희덕

샌. 2007. 9. 6. 11:07

벌겋게 녹슬어 있는 철문을 보며

나는 안심한다

녹슬 수 있음에 대하여

 

냄비 속에서 금새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음식에

나는 안심한다

썩을 수 있음에 대하여

 

썩을 수 있다는 것은

아직 덜 썩었다는 얘기도 된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는 것

 

부패는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일종의 무릎 꿇음이다

 

그러나 잠시도 녹슬지 못하고

제대로 썩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

방부제을 삼키는 나여

가장 안심이 안되는 나여

 

- 부패의 힘 / 나희덕

 

돌아가신 장인 어른은 평상시 딸네미들이 마음에 안 들 때면 "썩을 년!"이라고 혼자 중얼거리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썩을 년'은 욕이 아니다. 제대로 된 욕이라면 '썩지 않을 년!'이라고 해야 맞다. 최고의 명당자리가 어디인가. 시신이 빨리 썩을 수 있는 곳이 좋은 자리다.

 

자신이 썩어 없어질 존재라는 걸 가슴에 품고 산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것은 자기 한계에 대한 고백이며, 무릎 꿇음이다. 진정한 겸손 또한 거기에서 나온다. 어찌 보면 불멸이라는 말만큼 오만하고 무서운 것도 없다.

 

자연의 힘은 부패의 힘이다. 부패를 통해 자연은 늘 새로워지고 있다. 반면에 문명의 정의를 썩지 않으려는 시도나 노력으로 내릴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인간의 대부분 욕망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자연의 힘을 이기지는 못했다. 가장 지독한 부패는 썩지 않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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