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소 / 권정생

샌. 2007. 9. 18. 12:21

보리짚 깔고

보리짚 덮고

보리처럼 잠을 잔다

 

눈 꼭 감고 귀 오구리고

코로 숨쉬고

 

엄마 꿈꾼다

아버지 꿈꾼다

 

커다란 몸뚱이

굵다란 네 다리

 

- 아버지, 내 어깨가 이만치 튼튼해요

가슴 쫙 펴고 자랑하고 싶은데

그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소는 보리짚 속에서 잠이 깨면

눈에 눈물이 쪼르르 흐른다

 

- 소 / 권정생

 

선생은 죽는 날까지 오두막에서 병고와 친구하며 자발적 가난을 살았다. 이웃의 가난한 이들의 삶과 똑 같이 산 것이다. 10억이 넘는 그의 인세는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보내달라는 유언으로 남겨졌다. 이 맹렬한 자본주의의 시대에 다시 선생을 기억한다.

 

'물물천(物物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 세상 만물이 하늘이고, 하느님의 얼이 들어있다는 뜻이다. 평생을 산속에서 석이(石耳)를 뜯으며 산 어느 분도 그런 말을 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터득해야 하는 지혜인 것 같다. 소의 눈물에 연민을 느낀다면, 소 안에 들어있는 그분의 모습을 본다면, 소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당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다른 생명이나 온 존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함부로 사는 것이 두려워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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