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 문태준

샌. 2007. 9. 28. 09:50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나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 문태준

 

문태준의 시에서는 선(禪)의 향기가 난다. 나는 '신비'라는 말이 좋다.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현상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인과로 얽힌 거대한 네트워크를 상상하면 현기증이 인다. 그것은 인간의 지각 능력 이상의 그 무엇으로 4차원 시공간의 틀을 초월하는 신비의 세계다. 우리가 아는 것이란 실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때의 '순식(瞬息)'은 10의 17제곱분의 1이라는 아주 작은 수다. '찰나(刹那)'는 '순식'의 100분의 1에 해당되는 더 작은 수다. 현대물리의 양자역학 분야에서나 다루는 미소세계라 할 수 있다. 그냥 '아주 짧은 시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찰나 속으로 들어간다는 시 제목은 무엇이며, 모든 찰나에 비석을 세워준다는 시인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해하기 힘든 이 역설의 말에서 존재의 신비는 더욱 드러난다. 찰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찰나와 찰나 사이의 틈새는 또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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