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샌. 2007. 10. 7. 07:51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煙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당신을 보았습니다 / 한용운

 

만해의 '님'이나 '당신'에는 조국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 이상의 심원한 의미가 있다. 그의 시에서는 종교 공통의 바탕과 인간 구원의 문제가 깔려 있다. 만해가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본 당신이야말로 진짜 부처고 예수라 할 수 있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법(法)이며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워낙 가짜가 횡행하고 가짜가 진짜 노릇을 하는 세상이니, 부자 이웃집과 힘 있는 장군이 되기를 종교가 선동한들 이젠 별로이상하지도 않다. 그러나 가난하고 힘 없는 자가 되어 그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려 하지 않는 모든 종교는 가짜다. 황금과 칼을 제사 지내는 연기에는 이 시대의 종교도 포함되어 있다.

 

이 물신의 시대에 우리가 진실로 만나야 할 것은 만해가 눈물 속에서 본 바로 그 '당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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