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못 살아도 돼

샌. 2005. 7. 11. 15:21

늘 서울과 터 사이를 오가는 생활에서 가끔씩 멀리 나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항상 가슴 아프게 느끼는 것이 우리 산하가 너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딜 가나 산을 자르고, 땅을 파헤치고, 무언가를 세우고 하는 토목 공사가 벌어지고 있는데 그 당위성은 둘째 치고 자연이 너무나 처참하게 훼손되고 있는 모습은 슬픔을 넘어 분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개의 경우 무지막지하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박정희 시대 때부터 개발 바람이 불었지만 최근의 노 정권 들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해진 것 같다. 신도사만 있는 줄 알았더니 행정도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복합도시 등 마치 온 나라의 도시화 작업이 시작되는 것 같다. 특히 지자체가 본궤도에 오르면서 이젠 지역마다 경쟁적으로 돈 되는 일을 유치하지 못해서 안달이다.

물론 지역 균형 발전의 논리에는 동감이지만 발전이라는 것이 이런 자본의 논리에 바탕을 둔 식이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어떤 면에서 투기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원인 제공을 하는 면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건 잘 사는 길이 아니고 막 사는 꼴에 다름 아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 파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성의 파괴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자연을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 다른 인간을 대하는 태도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경제 체제 자체에 대한 근본 물음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지속적인 성장과 대량 생산, 대량 소비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체제가 과연 우리와 우리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체제가 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명목상의 소득 증가와 안락을 얻는 대신 우리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것들을 잃어가고 있다.

따뜻한 인간애는 사라지고 어릴 때부터 경쟁에 길들여지고 있다. 세상은 살벌한 전쟁터이다. 직장을 구하기도 힘들지만 거기서 생존해 나가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세상에서는 이기주의가 판을 친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 국가 이기주의는 도리어 당연시되고 있다.


지구 환경은 극도로 악화되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 삶의 터전이 중병을 앓고 있다.

공기와 물이 오염되고 못 쓰게 되는데 아무리 웰빙을 외친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대도시에서 공기청정기를 달고서 잘 산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은 슬픈 코미디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인류는 값 비싼 희생을 치르고 각성의 과정을 거친 후 문명의 전환을 이룰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지금 같으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더욱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문명의 붕괴든가 아니면 ‘멋진 신세계’ 같은 암담한 미래일 것이다.


수 십 년간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를 매일 들으며 큰 세대여서인지 우리는 잘 살아야 하고 경쟁에 뒤쳐지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대신에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묻는 내성적 질문은 약하기만 하다.


얼마 전에 모임 회원들과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지나가며 직선 도로를 낸다고 계곡을 메우고 산줄기를 끊어내는 현장을 보고 모두들 마음이 착잡해 졌다.

누가 말했다. “개발 정책 입안자들은 모두 옷 벗겨야 해.”

그리고 또 누가 말했다. “차라리 더 못 살았으면 좋겠어.”


나라가 가난해서 사람들 마음이 이렇게 허기져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잘 살기 위해 부자 나라를 만들려고 저렇게 안달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나라가 가지고 있는 부(富)가 균등하게만 돌아가도록 한다면 지금 상태로도 사람들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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