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잎 한 잎
마루 끝에 굴러들어도
님 오신다 하소서
개미 한 마리
마루 밑에 기어와도
님 오신다 하소서
넓은 세상 드넓은 우주
사람 짐승 풀 벌레
흙 물 공기 바람 태양과 달과 별이
다 함께 지어놓은 밥
아침저녁
밥그릇 앞에
모든 님 내게 오신다 하소서
손님 오시거든
마루 끝에서 문간까지
마음에 능라 비단도
널찍이 펼치소서
- 님 / 김지하
얼마 전에 김지하 시인이 이번 12월 대선에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누구는 변절이라고 욕을 했고, 누구는 이제 바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유신 시대 독재의 저항 아이콘으로서 시인이 가지는 상징성이 아직도 사람들의 뇌리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는 개인의 자유이니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의 말 중에 안철수 후보를 '깡통'이라고 부른 것이나, 육영수 여사의 미덕을 강조하며 박 후보를 여성 대통령으로 매김하는 것은 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시인의 표현은 아니었다고 본다. 한 인간을 평가하는데 너무 무모하고, 또한 '여성'이라는 언어가 주는 함의를 시인은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고운 시를 쓰시는 분이었다. 시에서 말하는 '님'은 누구일까? 아마 옛날 같았다면 내 마음도 능라 비단을 펼치고 '님'을 맞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시인을 보면 왠지 슬퍼진다. 간난고초 뒤에 도달한 시인의 생명 사상의 진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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