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시인의 정의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인류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이다. 지식을 자신의 이(利)를 탐하는 데 쓰는 사람은 사이비 지식인이요 지식 장사꾼일 따름이다. 우리 시대에 지식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쓴 시보다 산문을 읽는 게 훨씬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김수영의 산문을 통해 김수영 정신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냉철한 현실감각과 날카로운 비판 의식, 자기 성찰, 속물에 대한 경계, 반짝이는 천재성, 유머, 맑은 양심 등, 이번에 시인의 산문을 읽으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 중 두 번째 권이 산문집이다. 수필과 시론, 평론 등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 1부에 수록된 수필에 시인의 내면세계가 제일 잘 표출되어 있다. 진솔한 일상사를 통해 시인이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의 산문은 공허한 고담준론이나 얄팍한 감정의 토로가 아니다. 시대를 아파하는 마음이 글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2부 이후에 나오는 문학론은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한 시인의 주장이 들어있지만 나 같이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꼼꼼이 읽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1부에 나온 산문만으로 시인의 인간됨을 알아보는데 충분하다. 시인이 쓴 글에는 현실을 비판하는 내용이 많지만 그 바탕에는 따뜻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느냐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느냐와 일맥상통한다. 1968년에 쓴 '무허가 이발소'라는 짧은 수필이 있다.
무허가 이발소
무허가 이발소의 딱딱한 평상에 앉아서 순차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평화로운 때는 없다. 시내의 다방이나 술집 중에서 어수룩한 한적한 분위기를 찾아다니는 것을 단념한 지는 벌써 오래이고, 변두리인 우리 동네의 이발관까지도 요즘에 와서는 급격하게 '근대화'의 병균에 오염되어서 라디오 가요의 독재적인 연주에다가 미인계를 이용한 마사지의 착취까지가 가미되어 좀처럼 신경을 풀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좌석버스나 코로나 택시에서까지도 가요 팬의 운전사를 만나게 되면, 사색은 고사하고 그날 하루의 재수가 염려될 만큼 신경고문과 세뇌교육이 사회화되고 있는 세상에서는 신경을 푼다는 것도 하나의 위법이요 범죄라는 감이 든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소 군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이런 뒷골목 이발소의 고객들이란 주로 동네꼬마들과 시골서 올라온 인근 공장의 직공들인데, 스무 살도 채 안 되는 아이들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정중하게 인두질을 해주고 게다가 우스갯소리까지 해주면서 기껏해야 50원을 받는 이 영리행위는 너무나 바보스럽고 어처구니없이 불쌍해 보이기까지도 한다.
저 다 헤어진 신에, 저 더러운 옷에 저 반짝거리는 머리가 어떻게 어울린다고 저 불필요한 치장을 하나 하고 처음에는 화도 내보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불쌍한 저 아이가 저렇게 정중한 우대를 받고 사람대우를 받는 것은 무허가 이발소밖에 있으랴 하는 측은한 감이 들고,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얼마나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들인가 하는 원시적인 겸손한 반성까지도 든다. 참 할 일이 많다. 정말 할 일이 많다! 불필요한 어리석은 사랑의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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