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샌. 2013. 7. 18. 09:06

내가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반 일리치(Ivan Illich, 1926~2002)가 제시한 개념에서 도움받은 바가 크다. 일리치는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잘못된 것들을 깨부수는 사상가였다. 대표적인 게 학교, 의료체제, 교회, 경제 성장에 대한 신화 등으로 그는 우리 시대의 주류 사상과 충돌하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일루치는 늘 기존 이데올로기와 불화했다. 그는 형식적인 모든 의례를 거부한 사람이었다. 신부였지만 점점 정치적이 되어가는 교회의 정책에 반대하며 교황청과 마찰을 빚다가 사제직을 떠나게 된다. 신부에서 전사로 변한 것이다. 일루치는 인간이 현대의 고도 관리 시스템에서 병들어가는 현상을 늘 경계했다.

 

일리치 사상을 대표하는 세 단어가 '가난의 근대화' '근원적 독점' '반생산성'이다.

 

일리치가 현대사회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경제성장에 대한 근원적 비판일 것이다. 가난은 곧 미개발이며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근대화라고 대부분은 믿고 있다. 그러나 일리치는 '가난의 근대화(modernization of poverty)'라는 말로 이 생각을 완전히 뒤엎었다. 가난도 근대화 또는 현대화된다는 의미다. 근대화의 이상은 기술 발전으로 가난을 없애겠다는 것이지만, 일리치는 기술 발전이 특정 종류의 가난을 지속적으로 창출한다고 주장했다. 자동차가 발명되었을 때 초기에는 부자들만 자동차를 구입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단지 자동차가 없다는 이유로 가난해지고 말았다. 이런 가난은 기술이 발전하는 한 계속된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지 않았던 것들이 존재하게 되면서 이 신종 가난은 끊임없이 출몰한다. 일리치의 '가난의 근대화'는 전통적 가난이 현대화된 가난으로 변형된 것이다.

 

'가난의 근대화'와 연관된 것이 '근원적 독점(radical monopoly)'이다. 어떤 물건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어 그것을 사용하도록 강요하는 근원적 독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1단계는 새로운 상품이 만들어졌지만 가격이 비싸서 소수의 부유층만 구매할 수 있는 단계다. 2단계는 가격이 떨어지면서 보통사람들 대다수가 구매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 상품은 갖고 있으면 편리한 물건이다. 3단계는 그 상품 없이는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 만큼 사회가 재조직되는 단계로, 이제 물건은 편의품에서 필수품이 된다. 휴대폰이 보급된 과정을 살펴보면 이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제는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휴대전화 없이 살 수가 있나요?" 이제는 그 누구도 근원적 독점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 되었다.

 

현대기술의 근원적 문제점을 지적한 '반생산성'도 있다. 반생산성은 기술이 어떤 한계점을 지나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일리치의 독창적 개념이다. '의료시설은 건강에 중대한 위협이 되었다'라는 첫 문장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졌던 <의학의 한계>에서 그는 약이 수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고치는 단계가 있지만 어떤 한계를 지나면 생명을 살리기보다 건강을 위협하는 단계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의 예언대로 병원은 치료하는 것보다 더 많은 병을 만들어낸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스스로 배울 능력을 빼앗고, 감옥은 죄를 양산하고, 자동차는 교통을 지체시킨다. 반생산성 단계에 이르면 제도로 인해 개인들은 스스로 삶을 꾸려나가고 문제를 푸는 능력을 빼앗기고, 그 대신 전문가의 지식에 의존하도록 내몰린다. 급기야 제도가 인간의 삶을 대신하고, '역사상 가장 부유한 인류가 역사상 가장 무기력한 인간'이 된다.

 

우리나라 같은 성장 제일주의 사회에서 일리치는 낯설고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리치는 근원적인 각도에서 현대 인간의 삶을 바라본 사상가였다. 일리치는 살아있는 인간을 거대한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현대사회의 구조를 분석하고 비판했다. 그가 시종일관 문제로 삼았던 것은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고, 근대인의 삶을 노예의 삶으로 만드는 근본 원인과 과정을 탐구했다. 이 책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는 캐나다의 한 언론인이 이반 일리치와 5년간에 걸쳐 대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리치의 삶과 쓴 책의 내용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리치의 사상과 생애를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지만 일리치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딱딱하고 어려울 수도 있다.

 

사상의 특별함 뿐 아니라 사상과 일치하는 삶으로 인해 일리치는 존경 받고 있다. 1980년대에 일리치와 만났던 더글러스 러미스는 이렇게 회상한다. 일리치가 도쿄 유엔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오게 되었는데, 몇 달 간 묵을 수 있는 싸고 낡은 집을 알아봐달라고 러미스에게 부탁했다. 대학측에서 비용을 지불하지만 호텔에서는 지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러미스는 철거 예정인 허름한 아파트를 발견했다. 건물 전체에 사람이 살지 않는 낡고 지저분한 아파트였다. 일리치가 일본에 도착한 날, 그 집으로 안내하며 실망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일리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딱 내가 꿈꾸던 집이에요. 정말 고맙습니다."

 

일리치는 죽기 전 20년 동안 얼굴 한 쪽에 자라는 악성종양 같은 혹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병원에서 진단도 받지 않았고 치료를 받지도 않았다. 주변 친구들이 왜 그렇게 고통을 감수하냐고 물으면 일리치는 성 제롬의 말을 인용해 "나는 헐벗은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리치는 그 고통을 피해서는 안되는 시련이라고 느꼈고, 고통을 선물로 받아들였다. 그는 하루하루 충실한 삶 속에서 죽음을 맞을 준비를 했고, 때가 되자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는 말년으로 갈수록 세상에 대해 점점 비관적이 되었던 것 같다. 책에 소개된 글의 한 부분이 무척 어둡다.

 

"'나는 인간과 동물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병들게 만드는 독, 방사능, 상품 및 서비스의 홍수로부터 우리를 구해줄 능력이 있는 어떠한 통제 복합체도 상상할 수 없다. 이 세계로부터 빠져나갈 길은 없다. 나는 창조되었던 모습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가는 가공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오늘날 그게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어떤 공포가 우리 모두를 위협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몇 십 년 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때에는 이 가공된 세계를 뜯어고치는 책임을 내가 나누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늘 마침내 나는 무력하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책임'은 이제 하나의 망상이다. 그 같은 세계에서 '건강하다는 것'은 갖가지 기술의 조합, 헌경 보호, 그리고 이들 기술의 결과에 적응하는 것으로 압축되며, 필연적으로 이들 세 가지는 모두 특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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