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이 처음 나온 게 1987년이었으니 벌써 26년이나 되었다. 그때는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읽어보지를 못했고, 세상이 세 번이나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러서야 인연이 맺어졌다. 숲에서는 숲을 볼 수 없듯이 이렇게 좀 떨어져서 80년대를 바라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싶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은 2년에 걸쳐 문학잡지에 연재된 11개의 소설로 된 연작집이다. 멀고 아름다운 동네, 부천 원미동(遠美洞)에서 작가 자신이 살면서 동병상련한 이웃 이야기를 그렸다. 개발시대를 대표하는 원미동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동네였다.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시키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작가는 글을 쓰면서 침통한 심정과 분노에 가까운 감정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원미동 사람들에게 삶은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한계령'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창가에 붙어 앉아 귀를 모으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넘어져 상처입은 원미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는 실패의 되풀이 속에서도 그들은 정상을 향해 열심히 고개를 넘고 있었다. 정상의 면적은 좁디좁아서 아무나 디딜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도 그들에게는 단지 속임수로밖에 납득되지 않았다. 설령 있는 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리막길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수긍하지 않았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인생이란 탐구하고 사색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몸으로 밀어가며 안간힘으로 두들겨야 하는 굳건한 쇠문이었다. 혹은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였다."
80년대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여전히 피라미드의 정상을 향해 개미 행렬을 이룬다. 그러나 <원미동 사람들>을 읽으면서 작가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각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세상살이의 고단함과 서글픔이 모든 작품에 배어 있지만, 작가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체제의 잔인함을 드러내지만 과격하지는 않다. 고단한 인생살이의 행보에서 삶의 진정성과 엄숙함을 발견해 낸다. 비루한 삶에서도 희망과 따스함을 발견해 내는 것은 사람살이에 대한 연민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에 나오는 배수공 임씨가 있다. 주인공은 집의 욕실 공사를 맡기고 돈을 떼먹지나 않는지 의혹의 눈초리로 공사를 지켜본다. 나중에 서비스로 해주는 지붕 방수공사까지 의심한다. 그러나 임씨는 처음에 작성한 견적서까지 고치며 공사비를 수정한다. 자재가 적게 들어 처음 예상가의 1/3 정도만 나온 것이다. 그는 임씨의 정직함과 순박한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가난하고 초라하게 살아가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소설에는 짧게 나오지만 의미심장한 인물이 넷 등장한다. 산으로 가서 행방불명된 사람, 사회운동을 하다 감옥에 있는 사람, 원미동 시인, 그리고 으악새 할아버지다. 살벌한 경쟁 체제에 적응을 못하거나 개혁하려고 하다가 좌절된 사람들이다. 원미동 시인은 데모하다 학교에서 제적되고 군대에 다녀온 뒤로 정신 이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혔다. 80년대 정치 사회적 현실의 암담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 이야기가 좀더 자세히 나왔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다.
<원미동 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의 선량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경쟁 시스템에 밀려 변두리로 밀려났지만 산봉우리를 향해 아등바등 기어오르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원미동 사람들>은 절망적 몸부림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희망도 보여준다. 어떤 환경에서도 인간을 지탱해 나가는 힘이 무엇인지를 소설은 그려낸다. 절망과 희망은 모든 시대에 보편적인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누군가 말한 대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은 '서글픈 희망의 세계'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