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16)

샌. 2011. 7. 13. 11:32

무슨 팔자인지 법원을 자주 들락거린다. 생소했던 풍경도 익숙해지고 있다. 법원 구내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도 이젠 즐기는 편이다. 사람들의 딱딱하고 근엄한 표정도 여유 있게 살피게 되었다. 지나는 길에 가정법원이 있는데 심각한 얼굴의 부부들이 들고난다. 어제는 건물 귀퉁이에서 한 부부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서류 봉투에서 종이를 빼내려 하고 있었고, 남자는 뺏기지 않으려고 밀고 당기는 중이었다. 옆을 지나가는데 남자의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용없어. 이젠 다 끝났어.” 얼마 전에는 구내에서 지율스님도 만났다. 4대강에 관련된 소송에서 이겼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는데 아마 그것 때문에 오신 것 같다.

나에게 법정 경험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군대 있을 때 사단 법무부에서 법무서기로 근무했다. 재판 기록을 정리하고 분기마다 열리는 군사재판에서는 단상에 앉아 재판 과정을 기록했다.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전날부터 법정을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마치 잔칫집 같았다. 그리고 우리 사병에게는 재판 뒤 기록을 육군본부에 넘겨주려 가는 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3년간 있으면서 별의별 사건들을 접했다. 동정이 가는 피의자들도 많았다. 당사자에게는 엄청나게 중요한 사안인데 판단 과정은 그만큼 신중하게 다뤄지지 않는 게 안타깝기도 했다. 당시에는 제 3자 입장에서 지켜보았지만 지금은 내가 원고석에 앉아 있다.

그때 법무참모가 나에게 자주 하던 말이 기억난다. 당시에 나는 교직생활을 1년 정도 하다가 입대했다. “안 일병은 교사를 하니 좋겠어. 학생들을 잘 되라고 가르치며 존경도 받잖아. 우리는 늘 죄인만 다루고 징벌을 내리니 얼굴이 찡그러지기만 하고 못 할 일이야.” 고단한 졸병 생활에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도리어 높은 자의 배부른 푸념으로 들렸던 걸로 기억된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참모의 그 말은 본심이었다고 생각된다. 법원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무엇엔가 한이 맺힌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는 일이 어디 녹녹하겠는가. 이번 재판 과정에 참여하며 보니 법조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적 스트레스도 만만찮을 것 같다.

거의 1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는 이번 건에 대해 이젠 즐기기로 했다.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내 인생에서 법원 출입할 일이 또 언제 있을 것 같지 않다.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하며 소중한 인생 경험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변호사를 쓰지 않고 직접 내 손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기도 하다.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이기는 경우가 별로 없으니 소용없는 일이라고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기고 지는 결과를 떠나 이렇게라도 해야 여한이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일 덕분에 반가운 분과 재회하기도 했다. 그분은 고맙게도 부산에서 올라와 주셨다. 이제 사건 진행은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누구를 원망하거나 억울해 하는 마음은 사라졌다. 그게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는 이 재판이 마치 치유의 과정과 같다. 법정에 앉아 앞의 서기를 바라보니 35년 전의 내 모습이 아스라이 겹쳐진다. 싱싱하게 젊은 그 녀석이 고개를 돌리고 반백의 나를 향해 미소를 지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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