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성내리'라는 지명은 많다. 성이 있는 큰 고을이었다면, 성을 경계로 성 안 마을과 성 밖 마을이 구분되었을 것이다. 풍기도 조선 시대에는 풍기군이었으니 성내리라는 지명이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하겠다. 성터의 흔적도 있다는데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다.
풍기군 옛 관아터에 수령이 7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나무는 무척 노쇠한 모습이다. 전체 조선 시대와 함께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옛 건물은 전혀 찾을 길 없고, 오직 이 은행나무만이 세월의 무상을 증언하고 있다.
나무 옆에는 풍기초등학교가 있다. 국민학교 3학년쯤에 여기로 전학 와서 1년 정도 다닌 적이 있는 학교다. 아마 1961년 경이었을 것이다. 촌놈에게는 전기가 들어왔던 풍기는 휘황한 도회지였다.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면서 풍기 생활을 시작했지만 화재로 1년만에 손을 털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기억이 토막 그림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구경거리가 많았던 장날이 제일 신났다. 온 장터가 놀이터였다. 사람 이름을 총천연색 그림으로 그려주는 화공 앞에서는 넋을 놓기도 했다.
십여 년 전에 풍기국민학교 시절에 같은 반이었다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내 이름은 물론 같이 놀았던 장면도 여럿 상기시켜 주었는데 나는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 친구에 관한 사항도 물론 까마득했다.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친구는 무척 실망하는 눈치였다. 지금은 아쉽게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 공유할 기억이 없다면 친구라고 부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당시에 이 은행나무 아래서 놀기도 했을 것이지만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그때는 학교와 나무 사이에 담이 있었고, 민가도 빼곡하게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이 은행나무는 내 어린 시절과 연이 닿아 있는 나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