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본느낌

품인록

샌. 2014. 10. 9. 08:15

중국에서 고전 대중화의 길을 개척하고 TV 강의를 통해 학술 스타로 각광받고 있다는 이중톈[易中天] 교수가 쓴 책이다. '중국 역사를 뒤흔든 5인의 독불장군'이라는 부제로 항우, 조조, 무측천, 해서, 옹정제의 인물 품평을 다루었다. 인물 중심이라는 점에서 일반 역사서와는 좀 다르다. 그래서 제목이 '품인록(品人錄)'이다.

 

중국에서 인물 품평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전통인데 위진 시대에는 하나의 미덕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비평가들은 시적 감수성으로 인물을 평했다. "솔 아래 부는 바람처럼 소슬하다", "아침놀이 떠오르는 것처럼 당당하다", "봄날 버들처럼 산뜻하다" 등으로 묘사했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인물 비평이나 감상을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면서, 그것이 이 책을 쓴 동기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지은이의 주관이 들어간 품인록이다.

 

<품인록>은 역사에 별로 관심이 없는 나에게도 재미있게 읽히는 책이다. 솔직히 다섯 명 중에서 무측천, 해서, 옹정제는 생소한 인물이다. 지은이가 이 다섯 명을 고른 것은 이들이 굉장히 개성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품인록>에서는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예를 들면, 조조를 '사랑스런 간웅'이라고 표현하는 식이다. 물론 장점과 함께 단점도 지적된다. 결과적으로 이들이 실패한 것은, 항우는 특유의 단순함, 조조는 간교함과 교활함, 무측천은 악랄한 수법, 해서는 지독한 고집스러움, 옹정제는 시기심과 각박함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책에서는 짧게 지나가는 이야기지만 조조가 모살한 사람 중에 예형이 있다.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상관에게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그는 조조의 미움을 받아 죽었다. 어떤 때는 행동이 지나쳐 무례하고 사리분별이 없이 보이기도 했다. 조조를 면담하러 나간 자리에서도 상복을 입은 채 통곡하며 욕을 해댔다. 그에게는 무서운 게 없었다. 예형이 조조에게 쫓겨나 다른 나라로 떠날 때 많은 사람이 그를 배웅하려 나왔지만 아는 체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앉거나 누워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예형은 대성통곡을 했다. 왜 우느냐고 묻자, 앉아 있는 것들은 무덤이요 누워 있는 것들은 시체라, 자기는 지금 무덤과 시체들 사이에 있으니 어찌 통곡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그의 독설이 이랬다.

 

지은이는 예형을 오만한 태도로 남을 업신여기다가 제 무덤을 판 꼴이라고 평했다. 겉으로 보면 그런 측면도 있겠지만 미친 세상에서 예형의 행동은 이해되는 바가 없지도 않다. 비굴하게 사느니 차라리 미친 척하는 게 옳다고 믿었는지 모른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 않았다. 예형의 죽음은 닫힌 시대의 벽 앞에서 좌절한 한 뛰어난 인간의 안타까운 자폭이었다. 독재 권력도 어찌하지 못하는 이런 정신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개인이 특출나게 드러나는 행동을 꺼리는 중국 전통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대표적 인간형일 것이다.

 

건달이나 그 패거리들 때문에 세상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그들의 야심으로 인한 피바람에 얼마나 많은 민초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었는지 모른다. 조조는 개인적 원한을 갚는다고 수만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기도 했다. 작은 도둑은 감옥에 가지만, 나라를 빼앗은 큰 도둑놈은 영웅이 된다. 인간적 품성도 갖추지 못한 자들이 황제 자리에 앉아 얼마나 몹쓸 짓을 했던가. 이것은 과거의 일이기도 하지만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물이 어떤지는 당대에는 잘 알지 못한다.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제 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다.

 

깡패들 중에 일부는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제 욕심을 위해서는 사람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여겨야 한다. 연민이나 동정은 권력자에게 금기 사항이다. 그랬다가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 권력 앞에서는 아비고 자식이고 형제고 없다. 여덟살에 황제에 올라 61년간 통치했던 강희제는 35명의 아들을 뒀지만 그들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말년이 편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옹정제가 제위에 올랐지만 형제들은 도륙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역사는 거대한 비극이다.

 

신하였던 해서를 제외하고 나머지 네 사람, 항우, 조조, 무측천, 옹정제의 공통점은 집요한 권력욕이다. 좋게 말하면 권력의지인데, 이게 없으면 정상에 올라갈 수 없다. 그 야망을 이루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음모, 배신, 권모술수, 암살, 전쟁의 드라마는 슬프긴 하지만 흥미진진하다. 땅덩어리가 큰 중국이라 그런지 스케일도 대단하다. 최후의 일인으로 서기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만 아니라 시운도 따라야 한다. 난세에서 지도자의 덕목을 논하는 건 사치인 것 같다. 개성이 강한 독불장군 5인의 이야기를 잘 읽었다. 그들 역시 역사라는 무대의 꼭두각시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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