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얼맙니까?

추석 장을 보러 어머니를 모시고 시장에 갔다. 주차장을 찾느라 시장 골목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안 그래도 좁은 골목이 대목을 맞아 엄청 복잡했다. 조심해서 빠져나가는데 "저런 우째노!"라는 큰 소리가 들리고 시선이 내 차에 집중되었다. 놀라 내려가 보니 바닥에 진열된 채소 위를 차 바퀴가 지나가고 있었다. 할머니 앞에 놓인 가지와 고추가 짓뭉개졌다.

 

"다 얼맙니까?" 그때 내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었다. 미안해하는 건 오히려 할머니였다.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죄송함을 표시하는 게 우선일 터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안타까움이나 망가진 채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돈으로 해결하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내 실수로 손해를 끼쳤으니 보상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돈보다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그 채소는 할머니가 밭에서 손수 가꾼 것인지도 모른다. 시장에서는 돈으로 거래되지만, 할머니에게는 화폐 가치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할머니를 보며 세상이 거꾸로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계에 불과했다.

 

아직 교단에 서고 있는 지인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학교에서 폭력 사고가 생기면 요사이 잘난 부모들은 변호사를 데리고 나온다고 한다. 사고 처리는 법률적으로 진행된다. 덕분에 담임은 신경 쓸 일이 줄었다. 당사자들간에 뉘우치거나 용서하는 과정은 끼어들 여지도 없어졌다. 그런 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단다.

 

인간이 기계화되고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어처구니 없었던 내 행동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도 이미 부지불식간에 감정이 제거된 로봇으로 변하고 있는지 모른다. 금속 부품이 들어가야만 로봇이 아니다. 점점 세상이 살벌해지고 있다. 동정과 연민, 생명에 대한 사랑을 찾기는 힘들다.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면 당장 내가 그렇게 변한다. 얼마냐고 물으며 지갑을 열기 전에 먼저 할머니 손을 꼬옥 잡아드렸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