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손주 때문에 웃는다

샌. 2017. 3. 29. 10:55

동해에 살던 외손주가 가까이 왔다. 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만날까말까 했는데 이제는 거의 매일 본다. 다행히 어미가 육아를 맡고 있어 손주를 봐줘야 하는 부담은 없다. 딸은 다시 직장을 알아보고 있는데 솔직한 내심은 지금대로 제가 키웠으면 좋겠다. 맞벌이 부부가 되면 아무래도 손주에 온전히 매일 수밖에 없다.

 

세 살이 된 손주는 이제 제 의사 표시가 분명하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니 같이 노는 것도 재미있다. 집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도 이때다. 사실 아내와 둘이 있으면 웃을 일이 거의 없다. 둘째는 남자아이인데도 첫째보다 애교가 많다. 손주 때문에 웃음 근육이 되살아나고 있다.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도 미소가 인다.

 

남자라서 호기심을 가지는 대상도 첫째와는 다르다. 관심 우선순위가 자동차, 로봇, 공룡이다. 집에는 자동차와 로봇 장난감이 엄청나게 많다. 우리 자랄 때와 비교하면 너무 차이가 난다. 그래선지 아이의 사고나 어휘력이 우리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손주는 3월 초부터 어린이집에 나가고 있다. 그런데 적응을 못하고 교실에 들어갈 때부터 운다. 가방만 붙잡고 엄마한테 전화해 달라고 조르니 한 시간이 못 돼 돌아온다. 그동안 엄마하고만 지내서 더 그런 것 같다.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에 벌써 엄마와 떨어지는 연습을 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그러나 같은 나이 또래들이 저희끼리 잘 어울려 노는 걸 보면 빨리 친구들과 사귀도록 도와줘야 할 필요도 느낀다.

 

생명의 탄생은 물론이거니와 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신비롭다. 환경은 달랐어도 나 역시 저런 과정을 밟아 오늘의 내가 되었을 것이다. 손주와 놀다 보면 문득 할아버지가 내 얼굴에 오버랩 되는 때가 있다. 그러면서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만난다. 우리는 세대를 거치면서 똑같은 경험을 한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는 딱딱한 얼굴들이 누구나 천진난만한 어린 시절을 공유했다는 사실에 놀란다.

 

손주를 애틋하게 여기는 건 아무래도 나보다는 아내다. 거의 손주 중독 수준이다. 이심전심일까, 손주도 나보다는 할머니를 더 좋아한다. 아내는 손주가 오고나서 활기를 되찾았다. 손주와 할머니 관계에는 호모가 가족을 이루며 살아온 2백만 년의 역사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서로가 의존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는 유전적 친밀감이 분명히 있다.

 

어린아이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무장해제 된다. 인간의 천진성을 접하면 누구나 동심으로 돌아간다. 굳은 얼굴에도 웃음꽃이 핀다. 엄마의 까다로운 요구가 없는 할머니를 손주도 좋아한다. 자석의 다른 극처럼 손주와 할머니는 끌린다. 한쪽은 돋아나는 새싹이며, 다른 쪽은 저무는 석양이다. 극단은 서로 통하는 법일까, 깔깔거리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인류를 존속시키는 힘이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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