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나목 / 신경림

샌. 2017. 11. 29. 15:45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밴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나목 / 신경림

 

 

겨울나무는 영하 이삼십 도의 추위를 어떻게 견뎌낼까, 궁금한 적이 있었다. 수액이 얼면 세포가 파괴될 텐데 얼지 않게 하는 어떤 작용이 있을 것이었다. 겨울이 되면 부동액 성분이 방출되는지도 모르고, 나무 내부의 온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수관을 비워내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것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답이 있는지 아직 모른다.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는 인간의 지혜보다 훨씬 앞선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이루어지는 교감을 인간이 알 수 있을까? 나무가 별빛을 받아 어떻게 몸을 정화하는지 우리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겨울나무를 좋아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눈은 크고 깊고 슬펐다. 그 슬픈 빛과 겨울나무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그때는 몰랐다. 겨울나무는 쉬거나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겨울 찬 눈을 맞아가며 봄의 새잎을 위한 눈을 틔우고 있다. 앙상한 모습 뒤에서 처절한 생명 활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고투하는 시지푸스의 운명처럼, 멎으면 죽는다. 나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고통이 때로는 환희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4월의 아픔을 아는 그대는 겨울나무 옆에 설 자격이 있다. 따스히 내미는 손 외에 아무 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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