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맑은 웃음 / 공광규

샌. 2017. 12. 23. 11:07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웬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맑은 웃음 / 공광규

 

 

인간만이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른다. 치명적인 자뻑이다. 아무리 지력이 발달한들 우리는 그저 '털 없는 원숭이'일 뿐이다. 아니면 여기서처럼 '꼬리가 앞에 달린 괴상한 짐승'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따라 웃어본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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