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정상을 정복하고 자신의 목표를 이룬 사람에게도 후회가 있을까? 어느 신문에서 조치훈 9단을 인터뷰한 기사를 보았다. 올해로 입단 50주년을 맞은 조치훈 9단에게 감회를 묻자 첫마디가 "후회가 많아요"였다.
"술 먹는 시간 줄이고 열심히 공부했다면 더 잘했을 텐데, 하고 후회해요. 더 많은 승리나 타이틀을 놓쳐서만은 아니예요. 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바둑만 보고 살아온 인생이잖아요. 게으름 피우지 않고 공부했다면 스스로 만족하는 바둑을 두었을 테고, 나를 좀 더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무엇보다 자신이 납득하는 인생을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후회 없는 인생은 없을 것이다. 아쉬움이라고 해도 좋다. 과거를 돌아보며 슬퍼지는 것은 인생의 매듭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기 때문이리라.
조치훈 9단은 1980년대에 세계 일인자였다. 일본의 대삼관을 동시 석권했고, 그랜드슬램의 신화도 기록했다. 그의 치열한 바둑 세계는 '목숨을 걸고 둔다'는 말이 잘 대변해준다. 조치훈 9단한테서는 도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천진하면서 자유분방한 언행이 그렇다. 치열한 자기 수련을 통해 정상에 오른 사람이 가지는 아우라가 외모에서 풍긴다. 바둑을 통해 인생의 철리를 깨달은 게 아닐까.
조 9단은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하루 8시간씩 바둑 공부를 한다. 지면 슬퍼지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솔직히 말한다. 그의 인터뷰 대사 중 일부다.
"다른 사람이 늙는 건 잘 보이는데 내가 늙었다는 생각은 안 해요. 바둑이 약해서 슬픈 거지, 나이와는 관계없어요."
"젊을 적엔 지면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나이 먹으니 그런 생각을 싹 사라졌어요. 죽음이 멀리 있지 않으니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 바둑에 질지언정 하루라도 더 살고 싶어요. 하하하."
"저는 지난 일은 잊어요. 과거의 영광을 생각할 만큼 늙지는 않았어요. 미래의 희망에 부풀 만큼 젊지도 않고요.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사는 것만 생각해요."
"우승 트로피는 쳐다보기 싫고 매이기 싫어서 다 버렸어요. 그런데 그 트로피를 가져가는 사람이 있어요. 옆에 장모님이 사시는데 제가 버리는 족족 챙겨 가셨으니 완전히 없어진 건 아니지요. 과거의 영광은 그 집에 진열돼 있어요. 하하하."
"(조훈현은 국회의원이 됐다고 하자) 요즘 뭐가 뭔지 모르겠고 너무 힘들다고 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고생스럽지만 좀 더 노력해서 대통령도 하시라고. 청와대 초청받아 밥 좀 얻어먹으려고요. 하하하."
"(이창호에 대해) 너무 아파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제게 이창호는 넘기 어려운 열다섯 살 바둑 천재로 각인돼 있습니다. 내가 가장 셌을 때 그가 나타났지요. 그 천하무적이 이젠 착각을 하고 좋았던 바둑을 그르치는 게 믿기질 않아요. 내 일처럼 아파요."
"바둑은 아는 사람만 안다는 것이지요. 야구나 피아노는 문외한도 뭐가 대단한지 금방 알게 되잖아요. 바둑은 너무 좋은데 모르는 사람에겐 전한 방법이 없어요. 이기면 재미있고 지면 슬프지만, 내용이 좋으면 질 때도 어떤 만족감이 있고요. 제가 아마추어라면 평생 바둑만 즐겨도 후회 없는 일생일 것 같아요."
"치열한 승부가 제 존재의 이유잖아요.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랬는지, 정반대편에 있는 코미디에 끌렸어요. 별명은 '폭파 전문가'지만 시끄럽게 만드는 바둑보다 전성기의 이창호처럼 조용히 반집만 이기는 바둑을 존경합니다."
"알파고도 약점이 있어요. 공부를 하면 알파고처럼 둘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런데 알파고는 이세돌, 커제를 이긴 다음에 은퇴해버렸지요. 기분 나빠요. 경우가 아니잖아요."
"바둑 안 두고 매일 놀고 골프 치고 술 먹으면 행복할까. 그렇진 않을 것 같아요. 바둑 때문에 평생 자책하며 고독하게 살았지만 덕분에 재미있는 인생이었어요. 끝까지 후회 없는 바둑을 두는 게 바둑에 대한 예의겠지요."
후회할지라도 후회에 매몰되지는 않는다. 오늘을 열심히 살 뿐이다. 조 9단은 바둑에서 일가견을 이룬 사람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끝까지 후회 없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게 삶에 대한 예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