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구들이라는 104세 된 호주의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구들 박사는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로 가서 스스로 주사액이 들어가는 밸브를 열었다. 불치병이 없으면서 단지 고령이라는 이유로 안락사가 허용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구들 박사는 90세에도 테니스를 할 정도로 건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100세를 넘으면서 기력이 떨어졌고 눕거나 앉아 있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구들 박사는 '추하게 늙는 것(Aging Disgracefully)'을 피하고자 안락사를 선택했다. 마지막 순간에는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 나오는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졌다. 그가 선택한 곡이었다. 구들 박사는 "장례식을 치르지 말라. 나를 기억하려는 어떤 추모 행사도 갖지 말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오싱>으로 유명한 일본의 하시다 스가코(93) 작가도, 남에게 폐를 끼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작년에는 <안락사로 죽게 해 주세요>라는 책을 펴냈다. 어떻게 사느냐만큼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다.
남의 얘기가 아니다. 언젠가는 이런 문제에 맞닥뜨려야 한다. 살아 있다는 자체가 괴로워질 때가 찾아온다.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생존이 어려울 정도가 되기 전에 이분들처럼 죽는 방법이나 시기는 선택하고 싶다. 그러나 개인의 의지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이 되어야 한다. 고령화 사회에서 죽음의 문제는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존경하는 스콧 니어링 선생을 생각한다. 선생은 100세가 되었을 때 능동적으로 죽음을 맞았다. 기력이 다한 것을 알았을 때 스스로 곡기를 끊고 다음에는 음료를 끊었다. 어떤 약물의 도움 없이 평화롭게 눈 감기를 원했고 그대로 실천했다. "죽음은 광대한 경험의 영역이다.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모든 삶의 다른 국면에서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기술적으로 생명을 연장한다고 생명의 존귀함이 더해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가능하도록 인식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우리나라도 이제 연명 치료는 거부할 수 있는 초보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안락사까지는 멀었다. 스위스 등 몇 나라에서도 실제 시행은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번 구들 박사는 특별한 경우에 속하는 것 같다. 여생이 단지 연명하는 데 머무를 때, 본인이 원하고 가족이 동의하며 의료 위원회의 조건을 만족한다면 굳이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둘 이유는 없다고 본다. 나에게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누구에게도 폐 끼치고 싶지 않고, 아니다 싶을 때 내 길은 내가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