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 존자가 부처님께 여쭈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먼 뒷날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듣고 '참으로 그렇다'며 바른 믿음을 낼 수 있는 님들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 장로에게 말씀하셨네.
"수보리여,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여래가 열반에 든 뒤 오랜 세월이 흘러 바른 가르침이 사그라지려 할 때에도 맑은 삶을 가꾸고 따뜻한 지혜를 밝히는 님들이 있을 것이니, 이런 님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에 쉬이 믿는 마음을 낼 것이고 이런 님들은 이와 같은 가르침을 참답게 여길 것입니다.
수보리여, 그대는 알아야 합니다. 이런 님들은 다만 한 분 부처님 또는 몇 분 부처님께만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온 님들이 아닙니다. 이런 님들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께 가지가지로 깨달음이 씨앗을 뿌려 온 님들로서, 이와 같은 가르침을 들으면 마음이 몰록 열려 맑은 믿음을 내게 될 것입니다.
수보리여, 맑고 깨끗한 믿음을 내는 님들은 헤아릴 수 없는 복과 덕을 갖추게 될 것이니 여래는 그것을 환희 보고 여래는 그것을 환히 압니다.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저들은 다시는 '스스로 있는 나'가 있다는 생각, '죽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바뀌지 않는 나'가 있다는 생각, '숨 쉬는 나'가 있다는 생각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들은 '있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法相), '없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非法相)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라도 마음에 분별하는 생각을 갖게 되면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라도 '있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없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 '스스로 있는 나', '죽지 않는 나', '바뀌지 않는 나', '숨 쉬는 나'에 얽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하기에 '있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도, '없는 무엇이 있다'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뜻에서 여래는 한결같이 '수행자들이여, 여러분은 여래의 가르침을 강을 건너는 뗏목으로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해 왔으니, 가르침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가르침이 아닌 것이야 어떠하겠습니까?"
- 금강경 6(바른 믿음 드문 믿음, 正信希有分)
이때까지 '나'를 지키고 확장하며 살아왔다. 갑자기 마주치는 '나 없는 나'는 절벽이다. 수보리는 2천 년 넘게 지난 뒤의 나 같은 사람을 걱정해서 질문한 것 같다. 부처님은 고개를 끄덕이신다. '마음이 몰록 열려 맑은 믿음을 내는 ', '맑은 삶을 가꾸고 따뜻한 지혜를 내는', '맑고 깨끗한 믿음을 내는' 님들이 있을 것이라고.
'나 없는 나'는 논리나 언어 너머의 세계가 아닌가. '나'는 지금 여기 엄연히 존재하는데 '나 없는 나'는 무엇인가. '나 없는 나'는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서 작동되는 걸까. 여기 부처님 말씀을 보면 맑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고 한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으니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다투지 않을 것이다. '나 없는 나'가 세상에 드러나는 양식을 통해 우리는 바른 믿음의 한 부분을 본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발현하는 그 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