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사람이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에 일곱 가지 보배를 가득 채워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면 이 사람이 받는 공덕이 많지 않겠습니까?"
수보리 장로가 사뢰었네.
"행복하신 분이시여, 참으로 많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복덕은 복덕이라 할 것이 없는, '나 없는' 복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복덕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이 가르침 가운데 네 구절의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이웃과 함께 나눈다면 이 복덕은 저 일곱 가지 보배를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린 공덕보다 뛰어날 것입니다. 왜 그러하겠습니까? 수보리여, 모든 부처님과 위 없이 바른 깨달음이 하나같이 이 가르침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수보리여, 깨달음의 진리라는 것도 깨달음의 진리라 할 것이 없는, '나 없는' 깨달음의 진리인 것입니다."
- 금강경 8(나 없는 진리에서 모든 부처님이 나오시고, 依法出生分)
양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내'가 절을 수백 개 짓고, 수천 개의 탑을 쌓았는데 그 공덕이 얼마나 됩니까?" 달마대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없습니다." '나 없는' 공덕이 아니면 공덕이 아니다.
'이웃과 함께 나눈다'는 구절에 주목한다. 대승(大乘)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깨달음과 실천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 없는' 깨달음의 진리와 실천은 한 몸이다. 실천은 바른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향기다. 결국 하나다. "나 없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