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26)

샌. 2020. 11. 10. 11:20

 

 

학교에 행사가 있던 날이었다. 남은 술과 안주를 미리 숙직실에 챙겨 두었다. 내가 숙직하는 날이었고, 술꾼들은 자연스레 숙직실로 모였다. 그때는 남교사가 돌아가며 학교를 지키는 숙직을 했다. 여교사가 많은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세 번 정도씩 차례가 돌아왔다. 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야간 순찰은 학교에서 고용한 아저씨가 돌기 때문에 전화나 받고 자리만 지키는 정도였다. 결혼한 사람은 불편하게 여겼지만, 총각은 오히려 숙직을 좋아했다. 집에 갔다 왔다 하는 것보다 학교에서 자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숙직을 하면 술판이 벌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밖에서 한잔 걸치고는 술을 사 가지고 숙직실로 쳐들어가기도 했다. 취해서 흥이 나면 교무실에 들어가 앰프함을 열고 회의할 때 사용하는 마이크로 노래자랑도 했다. 원조 노래방인 셈이었다. 어디서건 술을 많이 마시면 개판이 된다. 아침에 엄숙하게 훈시를 하던 교장선생님은 그 마이크가 밤새 술꾼 교사들에게 시달렸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날은 푸짐한 술과 안주로 총각 셋이서 밤을 새우며 술을 마셨다. 새벽이 되어서야 한두 시간 눈을 붙였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소주 빈 병이 스무 개가 넘었다. 다음날 수업이 있는데도 겁도 없이 그렇게 마셔댔다. 교실에 들어가면 술 냄새가 난다고 앞에 있는 아이들은 코를 막는 시늉을 했다. 수업이나 제대로 했겠는가, 횡설수설하다가 종이 쳤겠지. 아니면 자습을 시켜놓고 숙직실에 내려가 엎드려 있던지. 그러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내 나이 이십대 후반, 아직 결혼하기 전, 일생에서 술을 제일 가열차게 마셔댈 때였다.

 

학교 앞 허름한 식당이 기억난다. 아무리 술을 퍼마셨어도 아침을 먹기 위해 꼭 그 집으로 내려갔다. 주인아줌마가 계란찜을 기막히게 잘했다. 우리가 찾아가면 누런 양은 냄비에 한가득 보글거리는 계란찜을 내왔다. 따끈따끈한 계란찜이 속으로 들어가면 그 이상의 해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계란찜을 좋아하게 되었고,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담백한 맛으로는 무엇이 계란찜을 따라 오겠는가. 요리하기도 간단하다. 계란 두 개를 유리그릇에 잘 풀고 물과 소금을 적당히 넣은 다음 전자레인지에 5분만 돌리면 끝이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반찬 걱정이 필요 없다. 시각적이나 미각적으로, 또 실용적으로 가장 완벽한 요리가 계란찜이라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술 마신 뒤의 실수담이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아찔했던 경험은 트럭 밑에서 잠이 들었던 사건이다. 나는 술에 취하면 길에서 자는 버릇이 있다. 장소 불문하고 누워 버린다. 경찰이나 지나가던 사람이 깨운 경우가 여러 번이다. 한번은 길가에 주차한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 갔던 모양이다. 보도 턱을 베개로, 트럭을 이불로 착각한 게 분명했다. 새벽에 일 나가기 위해 다가온 트럭 기사가 나를 발견했기에 망정이지 그냥 출발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뒤로 상당 기간 금주를 하며 다시 얻은 목숨을 지키려 애썼다.

 

젊었을 때 술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그때는 술 많이 마시는 걸 무슨 자랑처럼 뽐냈다. 철없던 시절이고 젊음의 객기였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 독재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암울하고 답답한 시대의 분위기도 한몫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을 학대하며 청춘을 낭비하는 걸 무슨 자랑인 양 거들먹거렸다.

 

이 사진은 Y 여중에 근무하던 그 당시(1970년대 후반)에 학생을 인솔해서 소풍을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점심시간에 담임은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했다. 보통 반장과 부반장이 담임의 도시락과 간식을 맡았다. 당시에도 치킨과 맥주는 인기 품목이었다. 이 역시도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요사이는 학부모나 학생한테 저렇게 음식 대접을 받으면 범법자가 되는 세상이다. 40년도 더 된 옛날이니 사진에 보이는 저 선생님들도 지금은 70대 전후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있으리라. 세월의 무상을 새삼 느낀다.

 

Y 여중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식 발령을 받은 첫 학교였다.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선생 노릇에 만족하지 못했다. 내 평생직장이 되리라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교육이나 학생에 대해 애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머리로는 딴 세계를 공상하면서, 주어진 현실에는 삐딱이로 행동했다. 교장, 교감의 눈 밖에 나는 게 당연했다. 연초에 담임을 배정할 때 간부회의에서 나한테 담임을 줘도 되겠느냐는 문제로 논쟁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 눈에는 선생 자격이 없는 놈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출근할 때 지하철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가는 길은 잿빛으로 황량했다. 큰 맥주 공장이 있었고, 그 옆을 지날 때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여기저기 우뚝 선 공장 굴뚝에서는 흰 연기가 솟아올랐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이런 유행가 가락이나 흥얼거리며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이 늘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강제와 타율의 시대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담임은 교실로 올라가 혼식을 하는지 학생들 도시락 검사를 했다. 공납금을 제때 거두는 것도 담임의 일이었다. 교무실 넓은 칠판에는 각 반의 미납자 숫자가 적혀 있어 늘 심사를 건드렸다. 숫자가 많으면 교감에게 불려가 빨리 내게 하라고 독촉을 받았다. 학년 초에 받는 환경조사서에는 생리 시작 여부를 묻는 칸도 있었다. 총각 담임에게 그런 걸 드러내야 하는 아이의 심정은 어땠을까. 지금은 기이하게 여겨지지만 그때는 당연시되었고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담임을 하면서 작은 독재자가 되어가는 내가 미웠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나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어느 해인가는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어 학급문고를 만들어 봤다. 당시 학교 도서관은 유명무실했다. 전문 사서가 없었고 장서도 부실했다. 도서관 담당 선생님은 방과 후에 문을 여닫는 일만 했다. 아이들에게 책을 한 권씩 갖고 오게 하고, 나도 여러 권을 준비해서 백 권 가까이 갖추었다. 돌려보면 일 년 동안 넉넉히 볼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독서에 흥미를 갖게 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몇 달 뒤에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책이 자꾸 없어져서 책도둑을 잡느라고 며칠간 밤 보초를 선 적도 있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의 직장 생활은 답답하고 숨이 막혔다. 나에게는 멘토 역할을 한 P 선배가 있었다. 아웃사이더 성향이 서로 비슷했고, 그래선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나를 이것저것 챙겨줬다. 살뜰하지는 않았지만 툭 던지는 한 마디가 새겨들을 내용이었다. 선배는 사회과여서인지 세상을 보는 눈이 예리하고 날카로웠다. P 선배도 선생 노릇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세상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학교 문화를 바꾸고 싶다는 말하면, 특유의 시니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버려 둬!" 아쉽게도 선배는 얼마 뒤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교무회의에서 내가 바꾼 게 하나 있다. 당시는 아침마다 직원 조회를 했는데 매번 주번교사가 일어나 그날의 청소와 활동 상황을 보고했다. 어느 반 주번 활동이 미흡하고 교실 정리가 안 되었다는 등 시시콜콜한 내용이었다. 특별히 얘기할 게 없어도 뭔가 만들어서 말해야 했으니 교사에게는 부담이었다. 다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마땅찮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 주번교사 차례가 왔을 때 "오늘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라면서 문제 제기를 했다. 교무실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많은 교사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뒤로 주변교사 발표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하도록 바뀌었다.

 

교사들의 처총당 아지트가 돈암동에 있었다. 상가 아파트의 작은 방에서 자취하던 사람 좋은 H 선배의 집이었다. 수시로 들락거리며 놀았는데 가끔 올나이트를 하기도 했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드는 법, K 선배가 어느 여선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둘은 결혼까지 생각한 것 같지만 여선생 쪽 집안의 반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중학교 선생은 발전 가능성이 작어 사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분발심에 K 선배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박사 학위까지 받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내가 그 학교를 떠나고 난 뒤의 일이지만, 뒤에 들은 바로는 결국 그 여선생과 헤어지고 시간강사를 하며 힘들게 산다는 소식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호감이 가는 후배 S가 있었다. 처총당 모임으로 여럿이 같이 택시를 타고 돈암동 아지트로 가던 길이었다. 택시에서 내리며 무심코 문을 닫았는데 S의 비명이 들렸다. 내 뒤따라 S가 내리는 줄 모르고 그냥 밀어버린 문에 S의 손가락이 짓눌린 것이었다. "뭣 하는 거예욧!"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붕대를 감은 손과 함께 오랫동안 냉기가 감돌았고, 변명을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지나간 세월 탓일까, 그때 선생님들을 떠올리면 참 좋은 분들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70년대의 선생님은 그래도 고전 시대의 향기가 살아 있었다. 경쟁 체제 속에서 아이들과 시달리고 있었지만, 인간 사이의 정과 순박함이 있던 시대였다. 지금처럼 얄팍한 심성으로 제 잇속을 챙기는 족속은 드물었다. 사진의 얼굴 표정에서도 그런 느낌이 전해온다. 자본주의에 의해 순치되기 이전 시대를 함께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인연이었다. 

 

Y 여중 시절을 생각하면 아름다운 기억은 별로 없다. 나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무력감에 시달렸고 불만을 품고 살았다. 단정한 선생이 되기에는 미숙한 인간이었다. 아이들에게 어떤 모범을 보이고 무엇을 가르쳤겠는가. 죄만 지은 것 같다. 그럼에도 자라는 아이들은 밝고 명랑했다. 나를 따랐고 이쁘게 봐줬다. 생명의 발랄함은 어디서 오는지 교단에 서면서 늘 경탄과 놀라움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그나마 교단에 붙어 있도록 한 힘이 되었다 할까. 앨범에 있는 그 시절 사진을 보며, 씁쓰레한 심정을 곱씹으며, 눈을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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