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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 박목월

샌. 2023. 3. 3. 10:41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나그네 / 박목월

 

 

이 시가 써진 1940년대 초는 일제의 수탈이 극성을 부릴 시기였다. 감옥에 갇힌 애국지사들도 많았고, 피를 토하듯 나라의 광복을 염원하는 시를 지은 시인들도 있었다. 이육사의 '광야'도 이 시기에 나왔다. 박목월의 '나그네'는 암울한 현실을 외면하고 너무 낭만주의에 경도되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밀밭 길' '술 익은 마을' 등 풍요를 상징하는 어구는 당시 민중의 삶을 배반한 느낌마저 든다. 

 

이 시는 학창 시절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 한때 나의 애송시였지만 시대 상황과 연관시켜 보게 된 것은 한참 뒤였다. 박목월은 1970년대에 육영수의 문학 가정교사로 청와대에 드나들게 된다. 육영수가 특별히 이 시를 좋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문학인들이 유신 독재체제에 저항하며 투쟁하고 있을 때였다. 같은 청록파인 박두진 시인은 반독재투쟁에 참여했다가 교수직을 잃고 낙향했다. 박목월 시인은 유신 시대에 대통령 찬가를 쓰고, 육영수 사망 후에는 육영수의 전기를 쓰기도 했다. 권력에 아부하고 몰역사적이었다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시를 시 자체로만 읽는다면 '나그네'는 인간의 초연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 분명하다. 나그네로서의 인생길에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특히 '구름에 달 가듯이'라는 표현은 절창이다. 그러나 시가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이나 시인의 삶, 또는 가치관과 연결시키면 시가 주는 감동이 달라진다. 시를 비롯한 예술 작품이 작가의 삶과 유리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작가 삶의 한 단면만을 가지고 작품을 재단하는 것도 위험하다. 오랜만에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를 접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착잡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이 읊었던 내 십대 시절이 행복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