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5

끼니 / 고영민

1 병실에 누운 채 곡기를 끊으신 아버지가 그날 아침엔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너무 반가워 나는 뛰어가 미음을 가져갔다 아버지는 아주 작은 소리로 그냥 밥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아주 천천히 오래오래 아버지는 밥을 드셨다 그리고 다음날 돌아가셨다 2 우리는 원래와 달리 난폭해진다 때로는 치사해진다 하찮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가진 게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한겨울, 서울역 지하도를 지나다가 한 노숙자가 자고 있던 동료를 흔들어 깨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먹어둬! 이게 마지막일지 모르잖아 - 끼니 / 고영민 얼마 전 모임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한 사람 이야기가 나왔다. 자기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이가 여럿 있었다. 정신력이 강하면서 존경을 받던 분이..

시읽는기쁨 2017.09.30

산등성이 / 고영민

팔순의 부모님이 또 부부싸움을 한다. 발단이 어찌 됐든 한밤중, 아버지는 장롱에서 가끔 大小事가 있을 때 차려입던 양복을 꺼내 입는다. 내 저 답답한 할망구랑 단 하루도 살 수 없다. 죄 없는 방문만 걷어차고 나간다. 나는 아버지께 매달려 나가시더라도 날이 밝은 내일 아침에 나가시라 달랜다. 대문을 밀치고 걸어나가는 칠흙의 어둠 속, 버스가 이미 끊긴 시골마을의 한밤, 아버지는 이참에 아예 단단히 갈라서겠다며 갈 데까지 아주 멀리 가보겠노라 큰소리다. 나는 싸늘히 등 돌리고 앉아 있는 늙은 어머니를 다독여 좀 잡으시라고 하니, 그냥 둬라, 내가 열일곱에 시집와서 팔십 평생 네 아버지 집 나간다고 큰소리치고는 저기 저, 등성이를 넘는 것을 못 봤다. 어둠 속 한참을 쫓아 내달린다. 저만치 보이는 구부정한 ..

시읽는기쁨 2013.08.09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 즐거운 소음 / 고영민 심야에 세탁기 돌리는 소음으로 이웃 간에 칼부림이 나고 한 사람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를 어제 들었다. 얼마 전에는 현직 부장판사가 아파트 위층에 사는 주민과 층간소음 문제로 다툰 후 지하 주차장에 있는 이 주민의 차량 열쇠 구멍에 접착제를 넣고 타이어를 펑크냈다가 입건되기도 했다. 합의를 했지만 결국은 옷을 벗었다는 후문이다. 부장판사까지 이럴 정도니 공동주택의 층간소음 문제가 보통이 아니다. 왜 그렇게..

시읽는기쁨 2013.07.14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시장 한구석, 허름한 국숫집을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고단한 사람의 굽은 등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빈 그릇을 내려놓는다. 어떤 산해진미보다 ..

시읽는기쁨 2011.12.23

계란 한 판 / 고영민

대낮, 골방에 처박혀 시를 쓰다가 문 밖 확성기 소리를 엿듣는다 계란.....(짧은 침묵) 계란 한 판.....(긴 침묵) 계란 한 판이, 삼처너언계란.....(침묵).....계란 한 판 이게 전부인데 여백의 미가 장난이 아니다 계란, 한 번 치고 침묵하는 동안 듣는 이에게 쫑긋, 귀를 세우게 한다 다시 계란 한 판, 또 침묵 아주 무뚝뚝하게 계란 한 판이 삼천 원 이라 말하자마자 동시에 계란, 하고 친다 듣고 있으니 내공이 만만치 않다 귀를 잡아당긴다 저 소리, 마르고 닳도록 외친다 인이 박여 생긴 생계의 운율 계란 한 판의 리듬 쓰던 시를 내려놓고 덜컥, 삼천 원을 들고 나선다 - 계란 한판 / 고영민 장일순 선생님의 일화에 이런 게 있다. 선생님의 글씨도 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인정을 받고 있는데..

시읽는기쁨 2005.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