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진 4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날마다 먹고 먹히는 강한 자가 지배하지도 약한 자가 지배당하지도 않는 초원을 떠나 사막으로 갔다 잡아먹을 것 없으니 잡아먹힐 두려움이 없다 먹이를 쫓을 일도 부리나케 몸을 숨길 일도 없다 함부로 달리지 않고 쓸데없이 허덕이지 않으며 한 땀 한 땀 제 페이스는 제가 알아서 꿰매며 간다 공연히 몸에 열을 올려 명을 재촉할 이유란 없는 것이다 물려받은 달음박질 기술로 한 번쯤 모래바람을 가를 수도 있지만 그저 참아내고 모른 척한다 모래 위의 삶은 그저 긴 여행일 뿐 움푹 팬 발자국에 빗물이라도 고이면 고맙고 가시 돋친 꽃일 망정 예쁘게 피어주면 큰 눈 한번 끔뻑함으로 그뿐 낙타는 사막을 달리지 않는다 - 낙타는 뛰지 않는다 / 권순진 니체는 인간 정신이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이로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읽는기쁨 2023.04.25

소원수리 / 권순진

내 생이 꼬이기 시작한 건 오밤중 담 너머로 쌀 가마니 세 개를 넘기라는 선임하사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고부터다 불의에 수발을 들기 싫어서가 아니라 간이 작아서다 그 일을 보조하기 위해 방위 둘을 대기시키라는 지시도 듣지 않았다 우리 부대는 후방 헌병대였고 쌀은 남아돌았다 수감자들에겐 정량이 제공되지 않았으며 헌병들은 외식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음날 워커발로 조인트를 여러 차례 까였다 동료 사병들도 내가 포크 창에 찍힌 노란 단무지 같은 신세인 걸 다 알고 있다 그들의 비겁 위에 물구나무 선 연민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찍힌 건 나 말고도 더 있다 소원수리 때 '황소무사통과탕'에 대한 진실을 까발렸다가 필적감정으로 들통 난 K상병이다 나도 종이 앞에서 딸막딸막한 적은 있으나 다른 병사처럼 '현재 생활 만..

시읽는기쁨 2021.12.14

논어 새로 읽기 / 권순진

사람이 칠십까지 살아내기가 여의치 않았던 시절 그 나이라면 가르칠 일도 깨우칠 것도 없었겠다. 나이 오십에 하늘의 뜻을 다 알아차려야 한다 했으니 그 문턱 넘은 뒤로는 다만 제각기 붙은 자리에서 순서대로 순해지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귀가 순해지는 이순耳順에 앞서 쉰다섯 즈음엔 입이 순해지는 구순口順이어야 지당하고 귀와 입이 양순해진 다음에는 눈의 착함이 순서란 말이지 예순 다섯 안순眼順은 세상으로 향하는 눈이 너그러워질 때. 입과 귀와 눈이 일제히 말랑말랑해지면 좌뇌 우뇌 다 맑아져서 복장 또한 편해지겠거늘 아직도 주둥이는 달싹달싹 귓속은 가렵고 눈은 그렁그렁 찻잔 속 들여다보며 간장종지만 달그락대고 있으니. - 논어 새로 읽기 / 권순진 어제 읽기를 마쳤다. 무려 7년이 걸렸다. 를 다시 읽은 계기..

시읽는기쁨 2019.10.30

어떤 비대칭 장단 / 권순진

어느 보험회사 직원들의 멀리 소풍 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방향이 같은 김 과장과 이 여사가 카풀로 동승했고 박 여사도 이웃인 강 대리의 승용차 옆자리에 올라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참을 달리다 보니 어둑하게 서쪽 하늘이 물들 듯 피곤이 내려와 앉았다 김 과장은 깍듯하고도 나긋하게 '좀 쉬었다 갈까요?' 옆자리의 이 여사에게 쿡 말을 건넨다 이 여사는 잠시 뜸을 들이나 했는데 상큼하고 쿨하게 대꾸한다 '그러죠 뭐' 힘을 받은 차는 가야 할 길이 분명하다는 태도와 순간의 가속으로 '늘봄모텔'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차 어서 돌려요' 비슷한 시간 강 대리 역시 피곤하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쉬었다 갈 요량으로 박 여사에게 공손한 제의를 했다 하지만 젊은 호흡으로 단호히 '잠시 쉬..

시읽는기쁨 2010.0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