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2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지금 내가 숨 쉬는 한 호흡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인 적도 있고, 600년 전 세종대왕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시읽는기쁨 2019.08.11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올 여름에는 여러 편의 공포영화를 보며 집에서 지냈다. 공포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지만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

시읽는기쁨 2009.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