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샌. 2019. 8. 11. 11:55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니는 물, 물, 물...... 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모두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이 내 뺨을 타고 또 어딘가로 흘러가네.

 

-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 김혜순

 

 

지금 내가 숨 쉬는 한 호흡 속에도 우주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땅속 깊은 곳의 마그마인 적도 있고, 600년 전 세종대왕의 폐에 들어갔던 공기 분자도 있을 것이다. 생명이 다하면 내 몸은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해 보자. 분해된다는 것은 형태가 달라질 뿐 구성 입자는 변하지 않는다. 공기가 되고, 물이 되고, 나무가 되고, 나비의 날개 속에도 들어갈 것이다. 죽는다는 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 한 몸이 된다는 뜻이다. 의식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아직은 우리가 무지할 뿐이다.

 

물 한 방울에도 137억 년 우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부처님이 설하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存)'의 의미도 그러할 것이다. 내가 우주와 한 몸이니 내가 곧 우주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절대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물 한 방울의 가치는 우주만큼 크고 무겁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너와 내가 만나는 데 천만 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100년에 한 번씩 지상에 내려오는 선녀의 비단 옷자락이 바위를 스쳐 큰 바위가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한 겁(劫)이다. 지상 만물이, 이 순간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가. 아, 단지 그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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