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게으름 연습 / 나태주

샌. 2019. 8. 25. 09:55

텃밭에 아무 것도 심지 않기로 했다

텃밭에 나가 땀흘려 수고하는 대신

낮잠이나 자 두기로 하고

흰 구름이나 보고 새소리나 듣기로 했다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이런 저런 풀들이 찾아와 살았다

각시풀, 쇠비름, 참비름, 강아지풀,

더러는 채송화 꽃 두어 송이

잡풀들 사이에 끼어 얼굴을 내밀었다

흥, 꽃들이 오히려 잡풀들 사이에 끼어

잡풀 행세를 하러드는군

 

어느 날 보니 텃밭에

통통통 뛰어노는 놈들이 있었다

메뚜기였다 연초록 빛

방아깨비, 콩메뚜기, 풀무치 어린 새끼들도 보였다

하, 이 녀석들은 어디서부터 찾아온 진객(珍客)들일까

 

내가 텃밭을 돌보지 않는 사이

하늘의 식솔들이 내려와

내 대신 이들을 돌보아 주신 모양이다

해와 달과 별들이 번갈아 이들을 받들어

가꾸어 주신 모양이다

 

아예 나는 텃밭을 하늘의

식솔들에게 빌려주기로 했다

그 대신 가끔 가야금이든

바이올린이든 함께 듣기로 했다

 

- 게으름 연습 / 나태주

 

 

텃밭을 마음밭으로 바꿔 읽는다. 마음밭 가꾸느라 애쓰는 대신 무엇이 자라든 그냥 두기로 한다. 해와 달과 별들이 가꾸도록 나는 지켜보기만 한다. 텃밭은 온갖 진객들이 찾아오는 놀이터가 된다. 땅은 원래 그러한 것이었다. 선악의 판단만 멈추면 모든 게 꽃밭이 아니겠는가. 가끔은 게으를 줄도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