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준 4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 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 환장하겠다고 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 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 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 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가 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 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 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이야 꽃대궐이라더니 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 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 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 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 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 간밤을 설렜을 것이다 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

시읽는기쁨 2023.05.04

떡국 한 그릇 / 박남준

섣달 그믐 어머니의 한숨처럼 눈발은 그치지 않고 대목장이 섰다는 면소재지로 어머니는 돈 몇 푼 쥐어 들고 집을 나서셨다 사고 싶은 것이야 많았겠지요, 가슴 아팠겠지요 섣달 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 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다들 있는 것인디 돈 들일 것 있느냐고 못난 아들 눈치보며 두부전, 명태전을 부치신다 큰형이 내려오면 맛보이신다고 땅 속에 묻어 뒀던 감을 내어 오시고 밤도 내어 오신다. 배도 내어 오신다 형님의 방에는 뜨근뜨근 불이 지펴지고 이불 호청도 빨아서 곱게 풀을 멕이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 오것제 토방 앞 처마 끝에 불을 걸어 밝히시고 오는 잠 쫓으시며 떡대를 곱게 써신다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지나는 바람소리 개 짖는 소리에 가는 귀 세..

시읽는기쁨 2023.01.24

미황사 / 박남준

미황사까지는 아직 멀다 마음은 저 산너머로만 가 닿는데 이제 나아갈 길은 없구나 밤바다가 낯선 발자국에 자꾸 몸을 뒤집는다 여기까지라니 먼저 밀려온 물결이 땅 끝에 이를 때마다 부르지 않은 지난 일들이 나지막한 이름을 부른다 봄밤이 깊다 달마산 너머 열나흘 지나 보름 달빛이 능선을 향해 오를수록 산은 한편 눕고 혹은 일어나기를 거듭한다 잊었다는 듯이 잊지 않았다는 듯이 그래 때가 되면 이윽고 가야지 꽃숭어리째 붉은 동백이 긴 봄밤을 끝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땅바닥에 뚝뚝 목을 내놓는다 미황사까지가 멀다..... 그때 대웅전에 들며 나는 왜 그 말을 떠올렸을까 미황사를 등뒤로 발길을 떼놓는다 내게 있어 아득히 잡히지 않는 먼길을 떠올린다 결국 알 수 없는 그곳까지가 멀다 - 미황사 / 박남준 미황사에 가고..

시읽는기쁨 2018.04.28

깨끗한 빗자루 / 박남준

세상의 묵은 때를 적시며 벗겨주려고 초롱초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 깨끗한 빗자루 / 박남준 빗줄기를 빗자루와 연관시킨 시인의 눈이 색다르고 신선하다. 깨끗한 세상을 바라는 염원이 이런 눈을 트이게 한 것이리라. 도로 옆 텃밭을 가꾸는 분이 오토바이로 개울물을 실어 나르는 걸 보았다. 날이 가물어 큰일이라고 한다. 하늘에서 맑고 깨끗한 빗자루를 한나절이라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시읽는기쁨 201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