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떡국 한 그릇 / 박남준

샌. 2023. 1. 24. 12:08

섣달 그믐

어머니의 한숨처럼 눈발은 그치지 않고

대목장이 섰다는 면소재지로 어머니는

돈 몇 푼 쥐어 들고 집을 나서셨다

사고 싶은 것이야 많았겠지요, 가슴 아팠겠지요

 

섣달 그믐 대목장날

푸줏간도 큰 상점도 먼발치로 구경하고

사과며 동태 둬 마리 대목장을 봐오시네

집에 다들 있는 것인디 돈 들일 것 있느냐고

못난 아들 눈치보며

두부전, 명태전을 부치신다

 

큰형이 내려오면 맛보이신다고

땅 속에 묻어 뒀던 감을 내어 오시고

밤도 내어 오신다. 배도 내어 오신다

형님의 방에는 뜨근뜨근 불이 지펴지고

이불 호청도 빨아서 곱게 풀을 멕이셨다

 

이번 설에는 내려 오것제

토방 앞 처마 끝에 불을 걸어 밝히시고

오는 잠 쫓으시며 떡대를 곱게 써신다

늬 형은 떡국을 참 잘 먹었어야

지나는 바람소리

개 짖는 소리에 가는 귀 세우시며

게 누구여, 아범이냐

못난 것 같으니라고

에미가 언제 돈보따리 싸들고 오길 바랬었나

일 년에 몇 번 있는 것도 아니고

설날에 다들 모여

떡국이나 한 그릇 하자고 했더니

 

새끼들허고 떡국이나 해먹고 있는지

밥상 한편에 식어가는 떡국 한 그릇

어머니는 설날 아침 떡국을 뜨다 목이 메이신다

목이 메이신다

 

- 떡국 한 그릇 / 박남준

 

 

어느 집이나 이런 사연 하나 정도 없으랴. 명절은 아프고 설운 사연이 하염없이 드러나는 날이다. 하하호호 행복한 웃음소리 옆에는 외롭고 쓴 눈물 흘리는 집이 있다. 명절은 인정사정이 없다. 잠복해 있던 갈등과 상처가 드러난다. 어렸을 때 명절이 그저 즐겁기만 했던 것은 이웃의 고통이나 간난한 마음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제는 안다. 우리들 일상의 행복이란 타인의 눈물의 바다에 떠서 흔들리는 조각배라는 사실을.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함께 보내는 설날 연휴다. 손주들도 찾아와서 한바탕 재롱잔치를 하고 갔다. 오랜만에 4대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었다.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함께 떡국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애틋하고 안타깝고 서운한 감정들이 설날의 환한 햇살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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