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 5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말없이 손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민지의 꽃 / 정희성 순백의 지순한 마음을 생각한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걸 다, 꽃이야, 라고 부르게 될까. '아이는 어른의 ..

시읽는기쁨 2018.01.03

하늘길 / 함민복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보았다 - 하늘길 / 함민복 지지난달에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였다. 캔맥주를 부탁했다가 다 떨어졌다는 말을 듣고 승무원에게 화를 냈던 적이 있었다. 맥주도 안 주는 이따위 비행기가 어디 있냐고, 했을 것이다. 이 시를 접하니 그때 일이 더 뜨끔해진다. 시인은 하늘길에서 음식 먹는 것도 미안하고, 불경스러워 소변도 참았다는데 내 꼬락서니는 뭐였단 말인가. 아, 똑같은 길을 가도 사..

시읽는기쁨 2016.09.05

굴뚝집 / 김명국

꿈이 있다면 비록 허름하더라도 내 집을 갖는 일이다 논도 한 서너 마지기쯤 있으면 좋겠다 텃밭도 조금 있고, 남들도 갖기 꺼리는 밭이라도 내 몫이 된다면 그곳에다 채소를 심으리라 경운기는 있어야겠지만 없어도 괜찮겠지 가끔씩은 멀리 가야 하므로, 헌 자전거가 하나 있어야겠다 지붕은 슬레이트든 기와든 상관없겠지만 초가집이면 더욱 좋겠다 손수 들에서 거둔 짚으로 이엉을 얹고 용마름을 해두리니, 지붕을 잇는 가을날이면 눈부시리라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행복하리 일하는 날보다 일하지 않는 날이 더 많더라도 근심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다 책도 읽고 시도 쓰고 답답하면 논둑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떠날 수 있다면, 남들이 손가락질해도 할 수 없겠다 옆집에서 넘어온 오이순을 탐내지 않았듯 눈이 많이..

시읽는기쁨 2016.05.13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이랑을 만들고 흙을 만지며 씨를 뿌릴 때 나는 저절로 착해진다 - 내가 가장 착해질 때 / 서정홍 내가 이 꼴로 살아도 되는 걸까? 인간이 살아가는 가치와 본질은 무엇인가? 내가 닮아야 할 마음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 시를 접하니 농부의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마음이 아닌가 싶어진다. 자본주의 시대지만 그래도 아직은 착하고 순수한 농심(農心)이 어딘가에는 살아있을 것만 같다. 이 시는 같은 이름의 시집 에 실려 있다. 시집에는 이런 시도 있다. 혼인하고 이십 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집에 도둑님 다녀가셨다. 가난한 살림살이 가져갈 것이 없었던지 장롱 옷장 서랍장 가리지 않고 온통 뒤적거려, 방 안 가득 옷가지들이 수북이 쌓였다. 큰아들 녀석 학비 보내고 몇 천 원 남은 경남은행 통장과 생활비 몇 만 원 남은..

시읽는기쁨 2014.01.22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

시읽는기쁨 2011.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