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 3

서늘함 / 신달자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 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 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 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 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 - 서늘함 / 신달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나이 먹는 것과 사람다움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관성대로 살다가는 삶이 누추해질 뿐이다. 젊어서는 패기였어도 늙어서는 주책이 된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덜어내고 덜어낼 일이다. 서늘해질 일이다.

시읽는기쁨 2019.06.17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아침에 창을 열었다 여보! 비가 와요 무심히 빗줄기를 보며 던지던 가벼운 말들이 그립다 오늘은 하늘이 너무 고와요 혼잣말 같은 혼잣말이 아닌 그저 그렇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소한 일상용어들을 안아 볼을 대고 싶다 너무 거칠었던 격분 너무 뜨거웠던 적의 우리들 가슴을 누르던 바위 같은 무겁고 치열한 싸움은 녹아 사라지고 가슴을 울렁거리며 입이 근질근질하고 싶은 말은 작고 하찮은 날씨 이야기 식탁 위의 이야기 국이 싱거워요? 밥 더 줘요? 뭐 그런 이야기 발끝에서 타고 올라와 가슴 안에서 쾅 하고 울려오는 삶 속의 돌다리 같은 소중한 말 안고 비비고 입술 대고 싶은 시시하고 말도 아닌 그 말들에게 나보다 먼저 아침밥 한 숟가락 떠먹이고 싶다 - 여보! 비가 와요 / 신달자 비범함이란 평범한 일..

시읽는기쁨 2018.08.30

등잔 / 신달자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 등잔 / 신달자 시인이 쓴 수필집 를 읽고 가슴이 아렸다. 남편의 뇌졸중, 24년 동안의 병수발, 낙상으로 쓰러진 시어머니 간병 9년, 본인의 유방암 투병 등, 운명이 어찌 이렇게 가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인은 스스로의 표현대로 바보처럼 그 모든 시련을 감내하고 극복했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받고..

시읽는기쁨 2010.09.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