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 4

신록으로 물든 남한산성 한 바퀴

밤부터 설사가 많이 나와서 오늘 못 나가겠다고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노년이 되니 이런 식의 약속 어긋남이 자주 있다. 수시로 몸에 탈이 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외출하려고 준비중이었는데 그냥 집에 있기도 뭣해서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산야는 봄의 신록으로 물들고 있다. 이때의 숲 색깔은 꽃보다 더 아름답다. 특히 신록의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연두빛은 너무나 신비하다. 그윽한 생명의 색이다. 이제 막 옹알이를 하는 아기의 얼굴에 서린 미소 같은 것, 부드러움의 완전체 같은 것. 사진으로는 이 색깔이 전해주는 느낌을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성곽길을 걸을 때 곁을 스쳐가는 꽃들과 만나는 즐거움이 있었다. 여러 종류의 제비꽃이 반겼다. 개별꽃, 양지꽃, 붓..

사진속일상 2025.04.22

연초록에 젖다

유리창 밖으로 잠시 봄햇살이 환하다. 아침에는 비까지 뿌렸고 아직도 먹구름이 군데군데 하늘을 덮고 있다. 숨바꼭질 하듯 간간이 얼굴을 내미는 햇님이 그래서 더 반갑고 눈부시다. "아, 이런 날은 교실에서 벗어나고 싶다." "저두요. 저두요." 얌전히 앉아 있던 이쁜이들이 혼잣말을 알아듣고는 개구리들처럼 한 목소리다. 컴퓨터를 닫고 일찍 사무실을 나선다. 이럴 때는 옆에 한강이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윤중로에는 벚꽃비가 내린다. 바람이 꽃비를 소나기처럼 날리게 한다. 연초록을 찾아 샛강으로 내려간다. 꽃보다 더 고운 것이 지금의 나뭇잎 색깔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귀엽고 이쁘고 아기자기하다. 젖 비린내 나는 뺨을 깨물어주고 싶고, 꼭 껴안고 잠들고 싶어진다. 두 시간 ..

사진속일상 2010.04.24

신록

신록의 계절이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에서 신록을 유년과 장년과 노년으로 나누었는데 아마 지금의 신록은 유년과 장년의 사이쯤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른 봄, 이제 막 나무에서 새 잎이 나온 직후의 연한 연둣빛 색깔을 좋아하지만 지금처럼 아직 녹음에 이르기 전, 연초록의 빛깔이 나무를 감싸고 그래서 온산이 초록 물감으로 뒤덮인 이 때도 좋다. 사람으로 치면 파릇파릇한 십대의 모습일 것이다. 확실히 신록에는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는 묘한 힘이 있는 듯하다. 지난 주말에 고향을 다녀오며 대둔산에 들렀다. 나이가 들어서 찾는 고향은 이미 예전의 고향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많은 것들이 낡고 허물어지고, 어릴 적 동무들은 그 자리에 없고, 연로하신 부모님은 병과 세월의 무게 앞에서 힘들어 하신다. ..

사진속일상 200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