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정 4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한낮에 내리는 눈을 본다. 살포시 내리는 작은 눈송이는 땅에 닿자마자 녹으면서 흔적이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고체에서 액체로 상태만 변했을 뿐이다. 사람의 죽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며 물끄러미 바라본다. 젊었을 때 이 시를 만났다면 '임'은 그리..

시읽는기쁨 2024.03.02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푸른 산이 흰구름을 지니고 살듯 내 머리 위에는 항상 푸른 하늘이 있다 하늘을 향하고 산삼(山森)처럼 두 팔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일이냐 두 다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젊은 산맥으로 삼고 부절(不絶)히 움직인다는 둥근 지구를 밟았거니....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 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믄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나의 일과이거니.... - 들길에 서서 / 신석정 한 구절 때문에 오래 기억되는 시가 있다. 이 시의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도 그렇다. 무언가의 슬픔으로 인하여 이 구절을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었다.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게 인생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슬픔..

시읽는기쁨 2014.02.22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신석정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 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내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 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 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

시읽는기쁨 2011.09.09

작은 짐승 / 신석정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 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칼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에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 작은 짐승 / 신석정 시대가 암담하면 서정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은 커져가는가 보다. 이 시는 ..

시읽는기쁨 2008.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