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학 4

북녘 거처 / 안상학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 나는 갈 수만 있다면 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다만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 가짜 보석 반지를 찍어내던 프레스가 있던 작은 공장 신개발 지구 허름한 사람들의 발걸음 먼저 자리 잡고 프레스를 밟던 불알친구 비만 오면 질척이던 골목 안 그 낮은 지붕 아래 내가 살아본 이 세상 가장 먼 북녘의 거처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그해 여름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탄 열일곱 소년 행복과는 거리가 먼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 세 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을 벗어난 까까머리 전형처럼 후줄근하게 비는 내리고 청량리 앞 미주아파트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준 라면 한 끼 ..

시읽는기쁨 2021.11.15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신문 지국을 하는 그와 칼국수 한 그릇 할 요량으로 약속 시간 맞춰 국숫집 뒷방 조용한 곳에 자리 잡고 터억하니 두 그릇 든든하게 시켜 놓고 기다렸는데 금방 온다던 사람은 오지 않고 국수는 퉁퉁 불어 떡이 되도록 제사만 지내고 있는 내 꼴을 때마침 배달 다녀온 그 집 아들이 보고는 혹 누구누구를 만나러 오지 않았냐고 은근히 물어오길래 고개를 끄덕였더니만 홀에 한 번 나가보라고는 묘한 미소를 흘리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 마당을 지나 홀 안을 빼꼼 들여다보니 아연하게도 낯익은 화상이 또한 국수를 두 그릇 앞에 두고 자꾸만 시계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안동 숙맥 박종규 / 안상학 오늘 점심은 시장에 나가 국수를 먹었다. 잔치국수 한 그릇에 4천 원이다. 집은 허름하지만 국수는 맛있고 양도 푸짐하다...

시읽는기쁨 2019.03.17

장마 / 안상학

세상 살기 힘든 날 비조차 사람 마음 긁는 날 강가에 나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 보면 저렇게 살아 갈 수 없을까 저렇게 살다 갈 수 없을까 이 땅에 젖어들지 않고 젖어들어 음습한 삶내에 찌들지 않고 흔적도 없이 강물에 젖어 흘러 가버렸으면 좋지 않을까 저 강물 위에 내리는 빗방울처럼 이 땅에 한 번 스미지도 뿌리 내리지도 않고 무심히 강물과 몸 섞으며 그저 흘러흘러 갔으면 좋지 않을까 비조차 마음 부러운 날 세상 살기 참 힘들다 생각한 날 강가에 나가 나는 - 장마 / 안상학 "사는 게 다 그래." 나만 힘들다 여겨질 때 가끔 되뇌는 말이다. 나에게만 집중하면 세상의 무게를 혼자 다 뒤집어쓴 것 같지만, 이웃으로 시선을 넓히면 사람살이가 다 비슷하다는 걸 보게 된다. 산다는 것은 견뎌내는 일이다. 외..

시읽는기쁨 2018.07.09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 무소식이다. - 아배 생각 / 안상학 통지표를 들고 아버지 계신 사무실로 달려갔다. 일제 시대 때 지어진 건물 뒤편 독립된 방에 아버지..

시읽는기쁨 2015.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