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애경 5

읽었구나! / 양애경

혜린이니 다혜니 하루에도 서너 건씩 비아그라 성인 음란광고가 이메일에 쌓여서 스팸신고 하다 하다 못해 5년 만에 답장을 했다 "저는 육십이 다 된 여자예요. 정력제 광고는 그만해주세요." 그 뒤, 이메일 제목이 달라졌다 비아그라 / 여성흥분약품 프리미엄 성인쇼핑몰 해외직수입 정품 아직 '여성흥분약품'이 남았구나, 그렇다면 "육십이 넘었다니까요." 이렇게 다시 답장을 해야 하나, 하다가 그나저나 신통방통하다 내 답장을 읽었구나! 누굴까 그 사람. - 읽었구나! / 양애경 나는 아예 모르는 이름의 발신 메일은 읽지를 않고 삭제한다. 열어봐야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긴요한 메일까지 삭제해서 낭패를 겪기도 한다. 가뭄에 콩 나듯 하지만 블로그에도 댓글이 달린다. 반가워서 열어보면 반 정도는 비아그라 같은 정..

시읽는기쁨 2022.07.24

남원 가는 길 / 양애경

임실을 지나 남원 가는 길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면 조그만 동네에도 있을 건 다 있지 여기 살 수 있을 것 같지 북부농협에서 예금을 찾고 농협 상점에서 식료품을 사고 오수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며 당장 오늘부터라도 살 수 있을 것 같지 나는 넝쿨장미인지도 몰라 철사로 엮은 길가 담장에서 이제 막 무더기 무더기 피어나기 시작하는, 붉은 꽃 한 송이 송이로는 보이지 않고 초록으로 무성한 이파리들 사이에 중간 크기 붓으로 몇 군데 문질러 놓은 것 같은 사실 꽃 피어도 그다지 보는 사람은 없는 넝쿨장미로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니 여기서 내려서 논두렁 옆 둑길 하나로 걸어들어가서 방 한 칸 얻고 편지를 쓰고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고 농협에 구좌를 트고 그리고 농협 상점에서 쌀 한 봉지 비름나물 한 묶음 ..

시읽는기쁨 2022.06.26

이모에게 가는 길 / 양애경

미금 농협 앞에서 버스를 내려 작은 육교를 건너면 직업병으로 시달리다가 공원도 공장주도 던져 버린 흉물 공장 창마다 검게 구멍이 뚫린 원진 레이온 건물이 나올 것이다 그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젊은 버스 기사와 야한 차림의 10대 아가씨의 푹 익은 대화를 들으며 종점까지 시골길 골목을 가야 한다 거기서 내려 세 집을 건너가면 옛날엔 대갓집이었다는 낡은 한옥이 나오고 문간에서 팔순이 된 이모가 반겨줄 것이다 전에는 청량리역까지 마중을 나왔고 몇 달 전에는 종점까지 마중을 나왔지만 이제 이모는 다리가 아파 문간까지밖에 못 나오실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라고 이모는 말하고 싶겠지만 이제 푹 삭은 나이가 된 조카가 싫어할까봐 아이고 교수님 바쁜데 왠일일까 라고 하실 것이다 사실 언제나 바쁠 것 하나 없는데다가 ..

시읽는기쁨 2012.05.28

별은 다정하다 / 양애경

집에 돌아오며 언덕길에서 별을 본다 별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별은 그저 자기 할일을 하면서 반짝반짝하는 거겠지만 지구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눈에 닿는 별빛이 몇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든지 그 별이 이미 폭발하여 우주 속에 흩어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든지 보이저가 가보니까 토성의 위성은 열여덟 개가 아니라 사실은 스물한 개였다든지 그런 걸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나도 다음 生에는 작은 메탄 알갱이로 푸른 해왕성과 얼켜 천천히 돌면서 영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작은 사람 같아서 가족의 식탁에 깨끗이 씻은 식기를 늘어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가운데 내려놓는 여자 같아서 별은 다정하다 - 별은 다정..

시읽는기쁨 2012.02.06

때밀이 아줌마는 금방 눈에 뜨인다 / 양애경

때밀이 아줌마는 때를 밀고 있지 않을 때도 금방 눈에 뜨인다 온통 벌거벗은 여자들 속에서 검거나 빨간 비키니를 입고 있기 때문일까 안 쓰는 대야를 걷어다 한쪽에 치우고 있거나 좁은 침대에 벗은 여자를 누이고 땀을 흘리며 문지르고 있을 때도 때밀이 아줌마는 다른 여자들과 어딘지 달라 보인다 처음에는 때밀이 아줌마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때를 밀게 하는 여자들이 더 눈에 뜨였다 만삭의 임산부나 시들어 조그매진 할머니가 누워 있으면 마음이 놓였지만 좁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왜소한 때밀이 아줌마에게 살집 피둥한 몸을 맡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면 ‘게으르기도 해라. 제 몸의 때도 제 손으로 못 미나.’ 살짝 끓는 물에 튀겨져 털을 밀고 있는 하얀 돼지 같기도 하고 잔돈푼에 노예를 산 거만한 마나님 같기도 하고 게다가..

시읽는기쁨 2011.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