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4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가벼운 교통 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미터만 가까워져도 앞 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제 팬티를 갈아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 아내는 외출할 때 부엌을 깔끔하게 정리한다. 만약 밖에서 죽었을 때 누군가 집에 들어와 보고 지저분하게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단다. 나는 허허, 웃을 수밖에 없다. 죽고 난 뒤에 팬티 걱정하는 사람보다는 덜 하다고 할까. 죽으면 아..

시읽는기쁨 2018.10.01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마당 위에는 멍석 멍석 위에는 환한 달빛 달빛을 깔고 저녁을 먹는다 마을도 달빛에 잠기고 밥상도 달빛에 잠기고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는다 밥그릇 안에까지 가득 차는 달빛 아! 달빛을 먹는다 초저녁에도 환한 달빛 - 여름에는 저녁을 / 오규원 정말 그랬다. 그 시절 여름에는 저녁을 마당에서 먹었다. 초가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고, 한쪽에는 모깃불 연기가 매캐한 가운데 멍석 위에 상이 차려졌다. 처마에 남포등이 흔들거렸지만 달빛이 오히려 환했다. 둥근 상 둘에 아홉 명이 둘러앉았다. 드문드문 말소리,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 수저를 놓고 멍석에 누우면 이만큼 뜬 달이 가득 들어왔다. 외양간의 소도 고단한 몸을 쉬며 고개를 딸랑거렸다. 지금은 마당 없는..

시읽는기쁨 2015.07.09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그저께가 오규원 시인의 1주기였는데, 지인들과 제자들이 모여서 추모식을 가졌다는 보도를 접했다. 어느 분이 추모사에서 시인을 가리켜 '누구..

시읽는기쁨 2008.02.04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몸은 맥이 빠지고, 마음은 천근이나 되는 양 무겁다. 거대한 장벽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 꼼짝도 못한다. 몸부림을 쳐보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악몽이 낮의 생활로 연결된다. 가치있다고 믿었던 삶이 무너지고 다시 혼돈 속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시읽는기쁨 2007.0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