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규 2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잡념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그르렁 물어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마음대로 제 밥그릇을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 있는, 그 경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한 학승이 조주(趙州, 778~897) 선사를 찾아왔다. "저는 공부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큰스님께서 잘 지도해 주십시요." 이에 선사는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시읽는기쁨 2015.03.25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 밭에 덮어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보고는 갑자기 손 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혀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어처구니 / 이덕규 재미있는 시다. 돋아나는 새싹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신선하고 특이하다. 보통은 새싹에서 갓난아기와 같..

시읽는기쁨 2005.08.06